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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함형수

효림♡ 2018. 2. 28. 09:00

                 

 

* 해바라기의 碑銘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碑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 묘비명 - 나태주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 

* 나태주시집[꽃을 보듯 너를 본다]-지혜,2015

 

* 묘비명 - 김태형

지금 견디는 자는 어깨도 없이 떨고 있는 사람이다

바닥도 없이 주저앉아 흐느끼는 사람이다

푸른 실핏줄 같은 통증이 나를 건너가고

그 끝닿은 곳 무덤으로 가져갈 것은 나 자신밖에 없으리라 *

* 김태형시집[코끼리 주파수]-창비,2011

 

* 묘비명 - 김광규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使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

* 김광규시집[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1979

 

* 불멸 - 장석남

나는 긴 비문(碑文)을 쓰려 해, 읽으면

갈잎 소리 나는 말로 쓰려 해

사나운 눈보라가 읽느라 지쳐 비스듬하도록,

굶어 쓰러져 잠들도록,

긴 행장(行狀)을 남기려 해

사철 바람이 오가며 외울 거야

마침내는 전문을 모두 제 살에 옮겨 새기고 춤출 거야

 

꽃으로 낯을 씻고 나와 나는 매해 봄내 비문을 읽을 거야

미나리를 먹고 나와 읽을 거야

 

나는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나를 새기려 해

꽃 흔한 철을 골라 꽃을 문질러 새기려 해

이웃의 남는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 해

나는 나를 그렇게 기릴 거야

그렇게라고 기릴 거야 *

* 장석남시집[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창비,2017

 

* 꿈의 귀향 -묘비명 - 조병화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

 

* 초혼가 - 서정윤

가는 자는 가고

남는 자는 남는다.
가는 자의 꿈까지
남은 자는 가꾸어야 한다.

새벽 안개 흐린 사이로
미처 행장도 꾸리지 못한 채
잠시 다녀온다는 발길도 떠난, 
아직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설 것 같은
그대를 아주 보내며
함께 떠난 나의 영혼을
부른다.

목숨처럼 사랑한 사람아
목숨보다 사랑한 그대여.

이제는 그대 떠난 하늘을 인정하고
남은 자의 꿈으로 살아 있기 위해
나는 이 남루한 눈물을 보이나니
그대는 또 어느 젊은 부부의 
어여쁜 아기로 태어나기 위해 
망각의 강을 건너고 있느뇨.

가는 자는 결국 가고
남은 자들만 남아 
부른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