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바라기의 碑銘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碑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 묘비명 - 나태주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
* 나태주시집[꽃을 보듯 너를 본다]-지혜,2015
* 묘비명 - 김태형
지금 견디는 자는 어깨도 없이 떨고 있는 사람이다
바닥도 없이 주저앉아 흐느끼는 사람이다
푸른 실핏줄 같은 통증이 나를 건너가고
그 끝닿은 곳 무덤으로 가져갈 것은 나 자신밖에 없으리라 *
* 김태형시집[코끼리 주파수]-창비,2011
* 묘비명 - 김광규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使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
* 김광규시집[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1979
* 불멸 - 장석남
나는 긴 비문(碑文)을 쓰려 해, 읽으면
갈잎 소리 나는 말로 쓰려 해
사나운 눈보라가 읽느라 지쳐 비스듬하도록,
굶어 쓰러져 잠들도록,
긴 행장(行狀)을 남기려 해
사철 바람이 오가며 외울 거야
마침내는 전문을 모두 제 살에 옮겨 새기고 춤출 거야
꽃으로 낯을 씻고 나와 나는 매해 봄내 비문을 읽을 거야
미나리를 먹고 나와 읽을 거야
나는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나를 새기려 해
꽃 흔한 철을 골라 꽃을 문질러 새기려 해
이웃의 남는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 해
나는 나를 그렇게 기릴 거야
그렇게라고 기릴 거야 *
* 장석남시집[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창비,2017
* 꿈의 귀향 -묘비명 - 조병화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
* 초혼가 - 서정윤
가는 자는 가고
남는 자는 남는다.
가는 자의 꿈까지
남은 자는 가꾸어야 한다.
새벽 안개 흐린 사이로
미처 행장도 꾸리지 못한 채
잠시 다녀온다는 발길도 떠난,
아직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설 것 같은
그대를 아주 보내며
함께 떠난 나의 영혼을
부른다.
목숨처럼 사랑한 사람아
목숨보다 사랑한 그대여.
이제는 그대 떠난 하늘을 인정하고
남은 자의 꿈으로 살아 있기 위해
나는 이 남루한 눈물을 보이나니
그대는 또 어느 젊은 부부의
어여쁜 아기로 태어나기 위해
망각의 강을 건너고 있느뇨.
가는 자는 결국 가고
남은 자들만 남아
부른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ㅡ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 - 오태환 (0) | 2018.03.08 |
---|---|
배꽃 - 곽재구 (0) | 2018.03.02 |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 - 오상순 (0) | 2018.02.26 |
비단 안개 - 김소월 (0) | 2018.01.08 |
철길 - 김정환 (0) | 2018.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