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 강은교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
* 강은교시집[어느 별에서의 하루]-창비,1996
* 가을 - 김광림
고쳐
바른
단청빛
하늘이다
경내는
쓰는 대로
보리수 잎사귀
한창이다
잎 줄기에서
맺혀 나온
염주알
후두둑 떨어진다
벼랑 위에
나붓이 앉으신
참 당신
보인다 *
그대가
내 주인이었으면 합니다
그대를 향해
붉게 달려가는
내 맘 아시겠지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시방 온 산과 들이
내 몸처럼 불입니다
그대 안에서
이 가을 활활 타버리는
나였으면 좋겠습니다
* 가을, 저녁강가 - 윤경희
단 한 번도
그대에게 가 닿지 못하였다
텅 빈 하늘
내려놓은 어스름 즈음 저녁강가
나직이 산자락 안고 제 몸을 비워가는
스러져간 기억의 편린 울컥 흘러갔다
잔잔한 물소리 야윈 등을 떠받고
검붉은 강바닥으로 조금씩 가라앉았다
별이 와서 지고, 꽃이 와서 또, 그렇게 지고
풀벌레들 까맣게 밤을 지세고 간
그 강가, 온종일 비가 내려 몸이 퉁퉁 불었던
때 늦은 雨氣가 남기고 간 맨 몸의 미루나무
내 갈증의 출렁임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이제는 지친 물소리 아픈 허리를 눕혀본다
* 가을밤 - 이해완
귀뚜라미여
잠시
울음을
그쳐다오
시방
하느님께서
바늘귀를
꿰시는 중이다
보름달
커다란 복판을
질러가는
기
러
기
떼
* 가을 - 이정하
가을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을 물들이며 옵니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모두가 닮아 갑니다
내 삶을 물들이던 당신
당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나요?
벌써부터
나, 당신에게 이렇게 물들어 있는데
당신과 이렇게 닮아 있는데 *
* 이정하시집[사랑해서 외로웠다]-자음과모음
저 불 같은 여름을 걷어 서늘한 사랑으로
가을 강물되어 소리 죽여 흐르기로 하자
달빛 난장(亂杖) 산굽이 돌아 저기 저 벼랑
폭포 지며 부서지는 우레 소리 들린다
흘러가면 그 별빛에도 오래 젖게 되나니
살아서 마주잡는 손 떨려도 이 가을
끊을 수 없는 강물 하나로 흐르기로 하자
더욱 모진 날 온다 해도 *
모감주* 숲길로 올라가니
잎사귀들이여, 너덜너덜 낡아서 너희들이
염주소리를 내는구나, 나는 아직 애증의 빚 벗지 못해
무성한 초록 귀때기마다 퍼어런
잎새들의 생생한 바람소리를 달고 있다
그러니, 이 빚 탕감받도록
아직은 저 채색의 시간 속에 나를 놓아다오
세월은 누가 만드는 돌무덤을 지나느냐, 흐벅지게
참꽃들이 기어오르던 능선 끝에는
벌써 잎 지운 굴참 한 그루
늙은 길은 산맥으로 휘어지거나 들판으로 비워지거나
다만 억새 뜻 없는 바람무늬로 일렁이거나 *
*모감주-무환자과의 낙엽 교목. 절이나 묘지 부근. 집 근처에서 볼 수 있다.
열매는 염주(念珠)를 만드는 데 쓰임
*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 나태주시집[시인들 나라]-서정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