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변방은 어디 갔나 - 고은
두 번 세 번 당부하구나
삼천리강산이 모조리 서울이 되어간다
오, 휘황한 이벤트의 나라
너도나도
모조리 모조리
뉴욕이 되어간다
그놈의 허브 내지 허브 짝퉁이 되어간다
말하겠다
가장 흉측망측하고 뻔뻔한 중심이라는 것 그것이 되어간다
서러웠던 곳
어디서도 먼 곳
못 떠나는 곳
못 떠나다
못 떠나다
기어이 떠나는 곳
내 마음의 개펄 바닥
해거리 명자꽃이 똑똑하던 곳
10년 전과
10년 후가 같았던 곳
어머니의 흐린 경대
거기 계신
한번도 본 적 없던
증조할머니도
못 본 고조할아버지도 함께 살던 곳
아버지쯤이 아득한 과거인 날들
꿈에도 없는 곳
무식한 아버지
묵은밭 어둑어둑 갈던 곳
진리가 마을 안에 있던 곳
내가 잠들면 너도 잠드는 곳
죽은 아저씨 살아 돌아오는 곳
소작료 삼칠제로 뼈 빠져버린 곳
눈 뜰 힘 없어 눈 감고 죽는 곳
낮은 콧잔등으로
호된 가난 견디어온 광대뼈로
제사상 앞에 엎드리던 곳
백년대계 따위 소용없는 곳
궂은비 오는 날 끼리끼리이던 곳
누가 죽으면 모두 상주인 곳
김씨도 장씨 숙부이고
갑씨도 을씨 사촌이던 곳
사또 나리 오시지 않는 곳
커다란 달밤
누군가가 그 달밤에
식칼 갈아 허공 포 뜨며 번뜩이던 곳
의미가 무의미에 고개 숙이는 곳
두고 온 그곳
내 변방은 어디 갔나 *
* 백지
시가 오지 않는밤
며칠째 무인폭격기 공습의 밤
카불 강 골짝
한꺼번에
두 손자와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파슈툰족 노인의 밤
오른쪽 다리 잃은
그 이웃집 굶주린 아이의 밤
피범벅이야말로 생인 밤
슬픔이란 알라란 얼마나 사치냐
얼마나 오랜 장식이냐
나의 백지 위에 시가 오지 않는 밤 *
* 부탁
아직도
새 한 마리 앉아보지 않은
나뭇가지
나뭇가지
얼마나 많겠는가
외롭다 외롭다 마라
바람에 흔들려보지 않은
나뭇가지
나뭇가지
어디에 있겠는가
괴롭다 괴롭다 마라 *
* 은파에서
이만한 가슴이면 좋겠네
잔물결 짓는
이만한 가슴속
그리움이면 좋겠네
그대의 반생애 수고 많았네
이만한 마음이면 좋겠네
물수제비뜨듯
물수제비뜨듯
어린시절
동그라미 무늬지는
그 마음이면 좋겠네
그대의 남은 생애 오고 있네
더도 말고
이만한 삶이면 좋겠네
하늘에 달
물에 달
물에 달이면
내 마음에 달 아닌가
그대와 나
이만한 삶이라면 그냥 좋겠네 *
*고은시집[내 변방은 어디 갔나]-창비,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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