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사하다 - 정호승
아침에 부석사 목어를 구워먹다
저녁에 천은사 목어를 삶아먹다
한밤에 아무도 몰래
운주사 목어를 데쳐먹다
다음날 아침에도 내소사 목어를 구워먹고
선운사 목어를 삶아먹고
송광사 목어를 회떠먹다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우리나라 산사의 목어란 목어는 다 회떠먹고
부처님 앞에 설사하다 *
* 종이학
종이학이 날아간다
지리산으로 날아간다
비가 오면 종이는 슬쩍
남겨두고 날아간다
봄비 그친 뒤
지리산으로 가보라
지리산 능선 위에
학이 앉아 웃고 있다 *
* 낙락장송
낙락장송에 눈 내린다
가까이 있는 산이 멀리 보인다
강가에서 강물소리도 듣지 못하던
솔숲에서 솔바람소리도 듣지 못하던
내 가슴에 하늘의 물소리가 들린다
인생에게 너무 눈치를 살피며 살아왔구나
내 짐승 같은 사랑도 더러움이 아니구나
꽃이 피었다가 지는 대로 지듯이
눈이 쌓였다가 녹는 대로 녹듯이
열심히 사는 대로 죽어야겠구나
낙락장송에 쉬지 않고 눈 내린다
바람에 낙락장송이 흰눈을 휘날린다
멀리 있는 산이 가까이 보인다
뿌리를 휘감고 도는 하늘의 물소리가 들린다
인생은 눈치를 보기에는 너무 길었으나
사랑하기에는 너무 짧구나 *
* 햇살 속으로
경주박물관에 가면
몸은 온 데 간 데 없고
돌부처의 머리만 길가에
쓸쓸히 앉아 있다
나는 어느 여름날
아내와 양산을 받쳐쓰고
그 돌부처의 머리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내 머리를 그 자리에 떼어놓고
돌부처의 모리를 내 머리에 얹고는
천천히 길을 걸었다
봉숭아 꽃잎을 바라보며
햇살 속으로 *
* 반달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
보름달이 반달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그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 *
* 길
님 그리며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며 님 그린다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님 그리며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며 님 그린다 *
* 정호승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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