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례 서(序) - 오규원
1
들은 길을 모두 구부린다
도식주의자가 못 되는 이 들(平野)이
몸을 풀어
나도 길처럼 구부러진다
2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나를 멈춘 자리에 다시
웅크린 이슬로 여물게 한다
모든 길은 막막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이 보이고
지워진 길을 인도하는 풀이 보이고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와 죽음을 지나
먼길의 귀 속으로 한 발자국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이 보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3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숲이 깊을수록 길을 지워버리는 들에서
무엇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호올로 나부끼는
몸이 작은 새의 긴 그림자는
무엇인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
나를 오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두고
길을 구부리고 지우고
그리고 무엇인가 멈추면서 나아가면서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나를 여기에서 떨게 하는 것은 *
* [오규원 시 전집1]-문학과지성사,2002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향의 천정(天井) 1 - 이성선 (0) | 2014.08.08 |
---|---|
낙타의 꿈 - 이문재 (0) | 2014.08.07 |
오래된 여행가방 - 김수영(金秀映) (0) | 2014.08.02 |
만금이 절창이다 - 문인수 (0) | 2014.07.20 |
풀리는 한강(漢江) 가에서 - 서정주 (0) | 2014.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