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지르는 비 - 신용목
울음 속에서 자신을 건져내기 위하여 슬픔은 눈물을 흘려보낸다
이렇게 깊다
내가 저지른 바다는
창밖으로 손바닥을 편다
후회한다는 뜻은 아니다
비가 와서
물그림자 위로 희미하게 묻어오는 빛들을 마른 수건으로 가만히 돌려 닦으면
몸의 바닥을 바글바글 기어온 빨간 벌레들이 눈꺼풀 속에서 눈을 파먹고 있다
슬픔은 풍경의 전부를 사용한다
* 울음을 다 써버린 몸처럼
우리 모두를 가지고도 한번도 우리에게 오지 않은
기다림처럼,
비가 오다가
어느 순간 신호등이 바뀌듯, 한발짝씩 누군가의 이름을 옮겨놓으며
오래 걷다가 멈추듯,
비가 오다가
미안해,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
그래서 눈을 먼저 보낸다. *
* 모래시계
잤던 잠을 또 잤다.
모래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잠이었다.
누구의 이름이든
부르면,
그가 나타날 것 같은 모래밭이었다. 잠은 어떻게 그 많은 모래를 다 옮겨왔을까?
멀리서부터 모래를 털며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모래로 부서지는 이름을 보았다.
가까워지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잤던 잠을 또 잤다.
꿨던 꿈을 또 꾸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파도는 언제부터 내 몸의 모래를 다 가져갔을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 신용목시집[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창비,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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