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전자 - 유병록
누가 내다 버렸을까
누가 내다 버렸을까
우그러지고 칠 벗겨진 달이 비를 맞는다
지붕도 처마도 없어
빗방울이 광대뼈에 그대로 꽂힌다
높이 떠올랐을 때 그 빛으로 여럿이 따뜻했겠다
달을 두고 둘러앉아 동그랗게 입술을 모으기도 했으리
기울이면 온기가 흘러나오고 기울이면 사랑이 흘러나오고
달 속으로 들어가 한잔 술을 마시는 자가 있었으리
달을 향해 두 손 모으는 아이들이 있었으리
월식의 밤이면
곤궁한 얼굴들은 지척에 있어도 서로를 분간하지 못하였겠지만
그림자의 시간을 돌아서 다시 떠올랐을
저 노란 달
여기저기 함몰된 채 비를 맞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주먹처럼 쏟아지는 세월의 골목에서 떨고 있다
이제 아무도 저것을 달이라 부르지 않는다
저 달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
* 유병록시집[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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