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줄포에서 - 이상국

효림♡ 2017. 12. 8. 09:00

* 茁浦 2 - 서정주 

사내 열두 살이면

피는 꽃이나 맑은 햇살이나 좋은 여자의 얼굴이

눈에 그냥 비치는 게 아니라

그 가슴에까지 울리어 오기 비롯는 나이

 

일본 <나가노>라는 데서 <요시무라 아야꼬>라는

서른네 살짜리 과부 여선생이 혼자서

3학년 된 우리 담임 선생으로 정해져 왔는데,

이 <오까미상>이

내 가슴속 염통에까지

고요한 날의 바이얼린 소리처럼

쩡하고 울려 오는

내 맨 처음의 여인이 되었네.

이건

무엄하고

또 미안한 일이지만.....

 

* 줄포에서 - 이상국 
동해에서 조반을 먹고
줄포(茁浦)에 오니 아직 해가 남았다
나라라는 게 고작 이 정도라면
나도 왕이나 한번 해볼 걸

큰 영 하나만 넘어도
안 살아본 세상이 있고
해 질 때 눈물 나는 바다가 있는데
나는 너무 동쪽에서만 살았구나
해마다 패독산(敗毒散) 몇 첩으로 겨울을 넘기며
나 지금 너무 멀리 와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
그래도 며칠 더 서쪽으로 가보고 싶은 건
생의 어딘가가 아프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라고
여기가 아니라고 추운 날
기러기 같은 생애를 떠메고 날아온
부안 대숲 마을에서
되잖은 시 몇편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만나는 여자도 없이 살았다고
지는 해를 바라보고 섰는데
변산반도 겨울바람이
병신같이 울지 말라고
물 묻은 손으로 뺨을 후려친다

나는 너무 일찍 서쪽으로 온 모양이다 *

 

* 줄포 여자 - 김명인   
낡은 유행가 좇아가느라 나 거기 주저앉았다
희망이 숨차느냐고 놀고 먹는 지 벌써 이태째,
포장 친 간이주점에서 보면 바다는
넘을 고개도 없는데 보리 고랑 가득 펴고 있다


남녘엔 봄 지나가고, 몇 년 만의 외출이냐고
한 가족이 아직은 릴 모래톱에 맨발을 적신다
짧은 봄날에는 채 못 피우는 꽃봉오리도 많다
시절이 저 여자에게 유독 가혹했을 것이다


접시에 담겨서도 꼼지락거리는
잘린 낙지발 중년이 입안에서 쩍쩍거릴 때
목포에서는 한창 잘 나갔지요, 거름을 파고들었던
홍어찜이 이제야 콧속을 탁 쏜다


여기도 예전의 줄포 아니라요, 어느새 경계 넘어버린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것 입맛이라고
저 여자, 버릇처럼 손장단으로 이길 수도 없을 붉은
봄꽃 피워 문다 *

 

* 줄포만 - 안도현
아버지는 붉은어깨도요 1664마리, 민물도요 720마리, 알락꼬리마도요 315마리에게 각각 날개를 달아주고 눈알을 닦아주었다

그들의 부리를 매섭게 갈아 허공에 띄워 올리는 일이 남았다

가을 끄트머리쯤에 포구가 폐쇄된다고 한다

아버지의 눅눅한 사타구니로 자글자글 습기가 번질 것 같다 어머니가 먼저 녹슬고 서글퍼져서 석유곤로에 냄비를 얹겠지

나는 가무락조개 빈 껍질처럼 하얗고 얇구나 수평선을 찢을 배 한 척 어디 없나 *

 

* 줄포마을 사람들 - 송수권

옛날, 할아버지 살던 줄포마을은 그렇지, 한틀 지게를 엎어놓으면 꼭 맞는 말일지도 몰라. 두 개의 산맥이 지게 목발처럼 내려앉아서 지게 고작처럼 휘어들더니, 바다의 중동을 자르고, 애타게 만나질 듯 만나질 듯 마주친 두 개의 재네 대궁지처럼 물 속에 자물리고 있더란다. 보름 사릿물이 오늘 때쯤은 지네발로 두 대궁지가 달싹달싹 일어서는 것이 눈에 역력하더란다.
또 바다는 蓮꽃 시벙글어, 지듯, 풍월 도사의 손끝에서 떨어진 부채마냥 폈다 오물리면서 마치, 할아버지의 째진 말총 갓 구멍으로 드나드는 겨울 호리바람처럼
피꺽피꺽 여러 마리 산새를 울리기도 하더란다.

언제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산농민의 상놈의 도둑놈의 떠돌이의 반생으로, 동학군이 날개가 잘리면서 어느 안핵사에게 호되게 걸려, 혀를 뽑힌 채, 한패거리들로 숨어와 터를 잡았더라는데 할아버지가 보기는 잘 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근동에서는 씨종에다 씨文書를 가진 벙어리 쌍것들로 구메 혼인에도 가마에 흰 띠를 못 얹혔다지만, 그래도 귀 떨어진 엽전 하나는 꼭꼭 때워쓰는 착한 사람들이더라는 것이다.

한번은 읍내 장터거리 그 쇠전머리 윷판막의 말뚝을 뛰어올라 반벙어리 장쇠아범이 혀를 집게로 뽑혀도 쌍놈의 말은 쌍놈의 씨로 남는 법이여, 그라믄 쓰간디. 그래도 우리 동학장이들의 바구미같이 바글바글 끓던 그때 그 장날이 멋이었당깨. 이러고서는 한참 외장을 놓더라는 것이다.
아 동헌 마루를 우지끈 부수고 알상투를 끌어내어 수염을 꼬시르고 깨를 벗긴 채 볼기를 쳐 三門 밖으로 내쫓았더니 그래도 양반 때는 알았던지 옴팡진 씨암탉처럼 槍 끝에 안 걸렸드랑가. 뚝 소리 내고 떨어졌당깨. 옴마. 그란디 한 여편네가 엎어지드니만, 옴마. 이 작것. 이 작것. 우리 딸니미 잡아먹은 갓끈 달린 이 작것 하드니만 치마폭에다 싸들고 줄행랑을 쳤드랑깨. 혀는 뽑혀도 말은 바로 허지만 말이여. 내가 그 달딴 녀석 아닌가 말이여. 알긋써. 이러더니란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늘 조금때쯤 바다는 복날 개 혓바닥 빠지듯이 그 길게 뽑힌 혀를 두 지네 대궁지 사이로 밀어넣고는 혀 뽑힌 줄포마을 사람들처럼 궁궁을을 궁궁을을 궁궁을을 맨날 이러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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