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묵죽 - 손택수

효림♡ 2008. 12. 8. 08:27

* 墨竹 -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墨竹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 2]-마음산책

 

* 강이 날아오른다  

강이 휘어진다 乙, 乙, 乙 강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 굽은 아낙 하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

 

호밋날 끝에 돌 부딪는 소리, 강이 들을 껴안는다 한 굽이 두 굽이 살이 패는 아픔으로 저문 들을 품는다

 

乙, 乙, 乙 물새떼가 강을 들어올린다 천마리 만마리 천리 만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 *

* 손택수시집[목련전차]-창비

 

* 길이 나를 들어올린다  
구두 뒤축이 들렸다 닳을 대로 닳아서
뒤축과 땅 사이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공간이 생겼다
깨어질 대로 깨어진 구두코를 닦으며
걸어오는 동안, 길이
이 지긋지긋한 길이
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나보다
닳는 만큼, 발등이 부어오르는 만큼 뒤꿈치를 뽈끈
들어 올려주고 있었나보다
가끔씩 한쪽으로 기우뚱 몸이 기운다는 건
내 뒤축이 허공을 딛고 있다는 얘기
허공을 디디며 걷고 있다는 얘기
이제 내가 딛는 것의 반은 땅이고
반은 허공이다 그 사이에
내 낡은 구두가 있다 *

 

* 화엄 일박 
화엄이란 구멍이 많다
구례 화엄사에 가서 보았다

절집 기둥 기둥마다
처마 처마마다
얼금 송송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그 속에서 누가 혈거시대를 보내고 있나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개미와 벌과
또 그들의 이웃 무리가
내통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화엄은 피부호흡을 하는구나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환하게 뚫려 있구나
그날 밤 누군가 똑똑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털고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창문 앞 물 오른 나무들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첫날밤을 염탐하듯 하늘에
뚫어놓은 구멍,
별들이 환한 박하향을 내고 있었다

* 손택수시집[목련전차]-창비

 

* 어부림
딴은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는 날
물고기들이라고 뭍으로
꽃놀이 오지 말란 법 없겠지
남해는 나무그늘로 물고기를 낚는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짙은 그늘 물 위에 드리우고
그물을 끌어당기듯,

바다로 흰 우듬지에 잔뜩 힘을 주면
푸조나무 이팝나무 꽃이 때맞춰 떨어져내린다
꽃냄새에 취한 물고기들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말채나무 박쥐나무 꽃도 덩달아 떨어져내린다
木그늘로 너희들 목에 내린 그늘이라도 풀어라
남해 삼동 촘촘한 그늘 가득 퍼득대는 물고기를
잎잎이 어깨에 메고 우뚝 선 어부림
꽃향기는 수평선 너머로도 가고 심해로도 가서
낚싯바늘처럼 단숨에 아가미를 꿰뚫는다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고 청미래 댕댕이 철썩 철썩
파도소리를 흉내내며 뒤척이는 숲
날이 저물면 남해는 나무들도 집어등을 켜든다 *

* 손택수시집[목련전차]-창비

 

* 가새각시 이야기  

 사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고가메 북쪽으로 씨러들어 가면 그날은 영락없이 비가 내린다, 한마을 한집에서 칠십년을 산 할머니의 말씀이다 볕이 저렇게 짱짱하기만 한데 말리던 고추를 거둬들이시고 논에 물꼬를 보러 간다, 바지런을 떠시던 할머니 진남포로 만주로 대령으로 똘똘 구르마 타고 떠돌던 할아버지 먼저 보내신 뒤, 가위 점을 처던 날들이 있었다 가새각시 가새각시 영검하게 맞출라면 핑 돌아가고 영검하게 못 맞출라면 까닥도 말고 가만히 섰소 지어오린 밥상 앞에서 명주실에 매단 가새각시 빙글 춤을 출 때 나는 의심 어린 눈으로 할머니 손목을 시큰등 노려보곤 하였지만 요즘은 시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가새각시 통 말을 듣지 않는다고, 가새각시 작두날에 녹이 슬기 시작했다고, 걸음걸음 벌렸다 오무린 발을 다시 떼기조차 힘겹다는 당신 설 앞날 서른다섯 손주를 마당에 업고 포대기처럼 빙 두른 흙담 곁 채마밭에서 들려주신다 아가, 별이 달을 뽀짝 따라가는 걸 보면은 내일 눈이 올랑갑다 꼭 이런 날 늬 할아비가 오셨구나 박가분 품고 이날치 판소리 한 대목맹키 굽이치는 추월산 가마골을 한달음에 넘어오곤 하셨구나 가위를 매달던 명주실 올올 흰 눈이 뿌리는 밤 가윗날에 흰 눈이 싹둑싹둑 베어지는 밤 할머니 이제 가위점은 치지 않고 무덤 이야기만 들려주신다 가세 가세 일찌감치 떠난 할아버지 곁에 지어둔 가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한마을 한집에서 일흔 해를 살고 한몸에 여든 일곱 해를 머문 뒤의 일이다

* 손택수시집[목련전차]-창비

 

* 꽃단추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

* 손택수시집[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

 

* 강철나비 
내가 맡지 못할 어떤 향기가 나비 날개에 탕탕 무쇠못을 박아놓았나
버려진 집을 한 송이 꽃으로 피워놓았나

폐가 문짝에 아직
붙어 있는
나비 경첩

녹슨 날개가 접히면서 문이 열린다
녹이 슬어 쉰 울음소리가 욱신거리는 날개를 타고 집을 흔든다 *


* 쥐수염붓
왕희지와 추사가 아꼈던 붓이다

족제비나 토끼털로 만든 붓도 있지만

그중에도 으뜸은 쥐수염붓

놀라지 마라, 명필들은

쥐 수염 중에도

배 갑판 마루 아래에 사는 쥐에게서

가장 상품의 붓이 나온다고 믿었단다

배가 삐걱거릴 때마다

수염을 쫑긋거리는 쥐

파도가 치는 대로

머루알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먼지 한 점 떨어지는 소리도 놓치지 않고 쭈뼛

일어설 줄 아는

그 수염이 최상의 붓이 되는 것이다

쥐에겐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지만

소심하다, 신경이 그렇게 날카로워서야 어찌 살겠느냐

핀잔을 듣는 날이 많지만

불안한 눈망울을 깜박깜박  

수챗구멍을 들락거리는 한 시절

쥐 수염 같은 것이 내게도 있어

듬뿍 머금은 먹물로 일필

휘지하고 싶은 때가 있는 것이다 *

* 손택수시집[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