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새벽 편지 - 정호승

효림♡ 2009. 5. 1. 08:12

* 새벽편지 - 정호승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

* 정호승시집[내가 사랑하는 사람]-열림원

 

* 새벽편지

나의 별에는

피가 묻어 있다

 

죄는 인간의 몫이고

용서는 하늘의 몫이므로

 

자유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하여

 

나의 별에는

피가 묻어 있다 *

 

* 부치지 않은 편지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 정호승시집[내가 사랑하는 사람]-열림원

 

* 부치지 않은 편지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

* 정호승시집[내가 사랑하는 사람]-열림원

 

* 기다리는 편지  

서울에도 오랑캐꽃이 피었습니다
쑥부쟁이 문둥이풀 바늘꽃과 함께
피어나도 배가 고픈 오랑캐꽃들이
산동네마다 무더기로 피었습니다
리어카를 세워 놓고 병든 아버지는
오랑캐꽃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물지게를 지고 산비탈을 오르던 소년은
새끼줄에 끼운 연탄을 사들고
노을 지는 산 아래 아파트를 바라보며
오랑캐꽃 한 송이를 꺾었습니다
인생은 풀과 같은 것이라고
가장 중요한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산 위를 오르며 개척교회 전도사는
술취한 아버지에게 자꾸 말을 걸고
아버지는 오랑캐꽃 더미 속에 파묻혀 말이 없었습니다
오랑캐꽃 잎새마다 밤은 오고
배고픈 사람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
산그늘에 모여 앉아 눈물을 돌로 내려찍는데
가난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함께 가난을 나누면 된다는데
산다는 것은 남몰래 울어보는 것인지
밤이 오는 서울의 산동네마다
피다 만 오랑캐꽃들이 울었습니다 *


* 또 기다리는 편지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 편지  

별들이 자유로은 것은
별 속에 새들이 날기 때문이다

별들이 아름다운 것은
별 속에 찔레꽃이 피기 때문이다

너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며
잠든 밤에도

또다시 하루가 돌아온다는 것이
무서운 오늘 밤에도

별들이 자유로운 것은
별을 바라볼 때가
가장 자유롭기 때문이다 *

* 정호승시집[새벽편지]-민음사

 

* 가을편지  

가을에는 사막에서 온 편지를 읽어라
가을에는 창을 통하여
새가 날으는 사막을 바라보라
가을에는 별들이 사막 속에 숨어 있다
가을에는 작은 등불을 들고
사막으로 걸어가 기도하라
굶주린 한 소년의 눈물을 생각하며
가을에는 홀로 사막으로 걸어가도 좋다
가을에는 산새가 낙엽의 운명을 생각하고
낙엽은 산새의 운명을 생각한다
가을에는 버릴 것을 다 버린
그런 사람이 무섭다
사막의 마지막 햇빛 속에서
오직 사랑으로 남아 있는
그런 사람이 더 무섭다 *

* 정호승시집[새벽편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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