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꽃 지는 날 - 도종환

효림♡ 2009. 5. 5. 10:17

 

* 꽃 지는 날 - 도종환


아침나절은 피는 꽃 지는 꽃을 보느라 다 보내고 오후에는 텃밭을 일구었습니다.

산기슭에 저 혼자 피었다 지는 나무의 꽃잎이 눈발처럼 날리는 날은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마당을 점점이 덮은 산벚나무 꽃잎, 연못 위에 떨어진 연분홍 개복숭아 꽃잎, 바람을 따라 푸른 하늘로 날아가는
자두나무 배나무 흰 꽃잎을 보며 아, 아 하는 말만 되풀이 하지만 그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가슴 깊은 곳으로 꽃잎처럼 떨어집니다.

올해는 민들레가 유난히 많이 피었습니다. 아침이면 뜨락 밑에 환하게 피고 해가 지붕을 넘어가면
뒤뜰 장작더미 밑에나 바지게 아래에 줄지어 꽃을 피웁니다. 민들레는 뿌리내릴 자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돌 틈이고 구석진 뒤뜰이고 거름더미 옆에고 가리지 않고 피어 척박하고 그늘진 그곳을 환하게 바꾸어놓습니다.  

민들레는 꽃이 지고 난 뒤에 씨앗으로 또 한 번의 아름다운 꽃등을 만듭니다.
민들레 씨앗이 만든 동그랗고 하얀 꽃씨다발은 모두 하나씩의 등불입니다.
먼 곳으로 흩어져 날아가기 직전에 스크럼을 짜고 침묵 속에 기도하는 형제들의 모습입니다.
햇살들도 민들레 꽃씨와 하나가 되어 먼 곳으로 함께 떠날 준비를 하며 고요한 순간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고추를 심었던 밭가에도 민들레가 많습니다. 예기치 않는 순간에 바람이 불어와 멀리멀리 날아가는 민들레 씨앗을

바라보다 삽을 들었습니다. 부디 잘 뿌리내리기를, 아름다운 꽃이 되어 다시 만나기를 빌었습니다.
감자를 심었던 밭고랑을 삽으로 파 엎자 지렁이가 온몸을 뒤틀며 몸부림칩니다.
몸으로 내리는 따스한 볕도 싫고 환한 세상도 원치 않는다는 몸짓입니다.
내가 씨앗을 뿌릴 모든 흙은 지렁이의 몸을 통과해 나오며 부드러워진 흙입니다.
밭일을 하다 땀을 씻느라 고개를 드니 낮달이 해사한 얼굴로 먼저 나와 있습니다.  

땀에 젖은 몸을 씻느라 물을 끼얹는 동안 온갖 새들이 웁니다.
몸에 부딪히며 튀어나가는 것이 물방울인지 새소리가 방울을 이루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갑니다.
나는 지금 새로운 땅을 찾아 민들레 씨앗처럼 날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낙화가 되어 아무도 모르는 산골짝에 묻혀

잊혀지고 있는 것일까, 그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새는 웁니다. *

 

* 도종환의 산에서 보내는 편지[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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