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진강 4 -누님의 초상 - 김용택
누님, 누님들 중에서 유난히 얼굴이 희고 자태가 곱던 누님.
앞산에 달이 떠오르면 말수가 적어 근심 낀 것 같던 얼굴로
달그늘진 강 건너 산속의 창호지 불빛을 마룻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던 누님. 이따금 수그린 얼굴 가만히 들어
달을 바라보면 달빛이 얼굴 가득 담겨지고, 누님의 눈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그 그렁그렁한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누님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왠지 나는 늘 그랬어요. 나는 누님의 어둔 등에 기대고 싶은
슬픔으로 이만치 떨어져 언제나 서 있곤 했지요. 그런 나를 어쩌다 누님이,
누님의 가슴에 꼭 껴안아주면 나는 누님의 그 끝없이 포근한 가슴 깊은 곳이
얼마나 아늑했는지 모릅니다. 나를 안은 누님은 먼 달빛을 바라보며
내 등을 또닥거려 잠재워주곤 했지요. 선명한 가르맛길을 내려와
넓은 이마의 다소곳한 그늘, 그 그늘을 잡을 듯 잡을 듯 나는 잠들곤 했지요.
징검다리에서 자욱하게 죽고 사는 달빛, 이따금 누님은 그 징검다리께로
눈을 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지요. 강 건너 그늘진 산속에서
산자락을 들추면 걸어나와 달빛속에 징검다리를 하나둘 건너올 누군가를
누님은 기다리듯 바라보곤 했지요.
그러나 누님, 누님이 그 잔잔한 이마로 기다리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니라는 것을,
누님 스스로 징검다리를 건너 산자락을 들추고 산그늘 속으로 사라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을 세월이 흐른 후, 나도 누님처럼 마룻기둥에 기대어
얼굴에 달빛을 가득 받으며 불빛이 하나둘 살아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누님이 그렇게나 기다리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니며 그냥 흘러가는 세월과
흘러오는 세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나도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헤어져 캄캄한 어둠속을 헤매이며 아픔과 괴로움을 겪었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과
만나고 또 무엇인가를 기다렸는지요.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아픔과 슬픔인지요 누님.
누님, 누님의 세월, 그 세월을, 아름답고 슬픈 세월을 지금 나도 보는 듯합니다.
누님, 오늘도 그렇게 달이 느지막이 떠오릅니다. 달그늘진 어둔 산자락 끝이
누님의 치마폭같이 기다림의 세월인 양 펄럭이는 듯합니다. 강변의 하얀 갈대들이
누님의 손짓인 양 그래그래 하며 무엇인가를 부르고 보내는 듯합니다.
하나둘 불빛이 살아났다 사라지면서 달이 이만큼 와 앞산 얼굴이 조금씩 들춰집니다.
아, 앞산, 앞산이 훤하게 이마 가까이 다가옵니다. 누님, 오늘밤 처음으로 불빛 하나
다정하게 강을 건너와 내 시린 가슴속에 자리잡아 따사롭게 타오릅니다.
비로소 나는 누님의 따뜻한 세월이 되고, 누님이 가르쳐준 그 그리움과 기다림과
아름다운 바라봄이 사랑의 완성을 향함이었고 그 사랑은 세월의 따뜻한 깊이를
눈치챘을 때 비로소 완성되어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님, 오늘밤 불빛 하나
오래오래 내 가슴에 남아 타는 뜻을 알겠습니다. 누님, 누님은 차가운 강 건너온
사랑입니다. 많은 것들과 헤어지고 더 많은 것들과 만나기 위하여, 오늘밤 나는
사랑 하나를 완성하기 위하여 그 불빛을 따뜻이 품고 자려합니다.
누님이 만나고 헤어진 사랑을 사랑하며 기다렸듯 그런 세월, 그 정겨운 세월......
누님의 초상을 닦아 달빛을 받아 강 건너 한자락 어둔 산속을 비춰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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