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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효림♡ 2009. 7. 18. 10:33

*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너부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

 

* 흔적  
생전에 아름다운 꽃을 많이도 피운 나무가 있다.
해마다 가지가 휠 만큼 탐스런 열매를 맺은 나무도 있고 
평생 번들거리는 잎새들로 몸단장만 한 나무도 있다.
가시로 서슬을 세워 끝내 아무한테도 곁을 주지 않은

나무도 있지만, 모두들 산비알에 똑같이 서서
햇살과 바람에 하얗게 바래가고 있다.


지나간 모든 날들을 스스로 장밋빛 노을로 덧칠하면서 
제각기 무슨 흔적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다하면서. *

 

* 나목(裸木)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밴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 그림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멘 채 시적시적
걸어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주막집도 들어가보고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대장간에서 풀무질도 해보고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옛사람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면 어떨까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지구 밖으로 훌쩍

떨어져나가고 싶을 때가있다 *

 

* 산수도 사람 때 묻어 -주왕산에서  
산은 켜로 쌓여

하늘과 닿은 곳 안 보이고

물은 맑은데도 깊이 알 길 없어

이곳이 사람 안 사는 곳인 줄 알았더니

무논에서는 개구리 울고

등 너머에서는 멀리 낮닭

홰치는 소리 들린다

알겠구나, 산수도

사람의 때 묻어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이치를

땀과 눈물로 얼룩진 얘기 있어

깊고 그윽해지는 까닭을 *

 

* 신경림시집[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랜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