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꽃과 언어 - 문덕수

효림♡ 2010. 5. 4. 09:56

* 꽃과 언어 - 문덕수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

 

* 실바람같이  

매달린

님의 빈가지를 찾아 

헤매는 

허공 속

오직 님에게만 올릴 

내 영혼의 

그 먼

흐느낌 *

 

* 풀잎 소곡

내사 아무런 바람이 없네
그대 가슴속 꽃밭의 후미진 구석에
가녀린 하나 풀잎으로 돋아나
그대 숨결 끝에 천 년인 듯 살랑거리고
글썽이는 눈물의 이슬에 젖어
그대 눈짓에 반짝이다가
어는 늦가을 자취 없이 시들어 죽으리
내사 아무런 바람이 없네
지금은 전생의 숲속을 헤매는 한 점 바람
그대 품속에 묻히지 못한 씨앗이네

 

* 인연설

어느 연둣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그랬더니 꽃잎 하나가 내려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의 먼지를 닦아내고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은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

 

* 원(圓)에 관한 소묘
한 개의 원이
굴러간다
천사의 버린 지환이다
그 안팎으로 감기는 별빛과
꽃잎들......
금빛의 수밀도만한
세 개의 원이
천개의 원이
굴러간다

 

신의 눈알들이다
어떤 눈알은 모가 서서
삼각형이 되어
쓰러진다
어떤 눈알은 가로누운
불기둥이 되어
뻗는다
한 개의 원이
8월 한가위의 달만큼
자라서
굴러간다 *
 

 

* 선(線)에 관한 소묘 1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쫓는다.

어둠 속에서 빗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쫓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 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 위에

동그란 우주(宇宙)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는다.

 

* 침묵(沈默)

저 소리 없는

청산(靑山)이며 바위의 아우성은

네가 다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겹겹 메아리로 울려 돌아가는 정적(靜寂) 속

어쩌면 제 안으로만 스며 흐르는

음향(音響)의 강(江)물!

 

천년(千年) 녹쓸은
종(鍾)소리의 그 간곡(懇曲)한 응답(應答)을 지니고,

황홀(恍忽)한 계시(啓示)를 안은 채
일체(一切)를 이미 비밀(秘密)로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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