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래를 위하여 - 정호승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 *
* 정호승시집[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 후회
그대와 낙화암에 갔을때
왜 그대 손을 잡고 떨어져 백마강이 되지 못했는지
그대와 만장굴에 갔을때
왜 끝없이 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서귀포 앞바다에 닿지 못했는지
그대와 천마총에 갔을때
왜 천마를 타고 가을 하늘 속을 훨훨 날아다니지 못했는지
그대와 감은사에 갔을때
왜 그대 손을 이끌고 감은사 돌탑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는지
그대와 운주사에 갔을때
운주사에 결국 노을이 질 때
왜 나란히 와불 곁에 누워 있지 못했는지
와불 곁에 잠들어 별이 되지 못했는지 *
* 정호승시집[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 친구에게
젖은 우산을 접듯
그렇게 나를 접지 말아줘
비 오는 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우산을 그대로 접으면
젖은 우산이 밤새워 불을 지피느라
그 얼마나 춥고 외롭겠니
젖은 우산을 활짝 펴
마당 한가운데 펼쳐놓듯
친구여
나를 활짝 펴
그대 안에 갖다놓아줘
풀 향기를 맡으며
햇살에 온몸을 말릴 때까지
그대 안에 그렇게 *
* 정호승시집[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 밤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눈 오는 밤에
불행한 사람들은 언제나 불행하다
사랑을 잃고 서울에 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끝없이 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끝없이 흔들리면
말없이 사람들은 불빛 따라 흔들린다
흔들리며 떠도는 서울밤의 사람들아
밤이 깊어갈수록 새벽은 가까웁고
기다림은 언제나 꿈속에서 오는데
어둠의 꿈을 안고 제각기 돌아가는
서울밤에 눈 내리는 사람들아
흔들리며 서울은 어디로 가는가
내 사랑 어두운 나의 사랑
흔들리며 흔들리며 어디로 가는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눈 오는 이 밤
서서 잠이 든 채로 당신이 그리워 *
* 정호승시집[내가 사랑하는 사람]-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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