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이 오면 - 도종환
가을이 와서 들판을 은행잎처럼 노랗게 물들이면
나도 대지의 빛깔로 나를 물들이리라
플라타너스 잎이 그러하듯
나도 내 영혼을 가을 하늘에 맡기리라
가을이 오면
다시 연필로 시를 쓰리라
지워지지 않는 청색 잉크 말고
썼다 지울 수 있는 연필로
용서로 천천히 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코스모스 같은 이를 사랑하리라
칸나같이 붉은 이 말고
들국같이 연한 빛으로 가만히 나부끼는 이를
오래 사랑하리라
가을이 와서
한알의 사과가 겸허히 익고 있으면
타는 햇살과 비바람에도 감사하리라
사과나무처럼 잠시 눈을 감고 침묵하리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 들국화 2
너 없이 어찌
이 쓸쓸한 시절을 견딜 수 있으랴
너 없이 어찌
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으랴
이렇게 늦게 내게 와
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
너 없이 어찌
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있으랴 *
* 사과꽃
아프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피었습니다
보고 싶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하얗게 피었습니다
하얀 사과꽃 속에 숨은 분홍은
우리가 떠나고 난 뒤에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살면서 가졌던 꿈은
그리 큰 게 아니었지요
사과꽃같이 피어만 있어도 좋은
꿈이었지요
그 꿈을 못 이루고 갈 것만 같은
늦은 봄
간절하였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하얗게 지고 있습니다 *
* 겨울 저녁
찬술 한잔으로 몸이 뜨거워지는 겨울밤은 좋다
그러나 눈 내리는 저녁에는 차를 끓이는 것도 좋다
뜨거움이 왜 따뜻함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하며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있는 겨울 저녁
거세개탁(擧世皆濁)이라 쓰던 붓과 화선지도 밀어놓고
쌓인 눈 위에 찍힌 산짐승 발자국 위로
다시 내리는 눈발을 바라본다
대숲을 흔들던 바람이 산을 넘어간 뒤
숲에는 바람 소리도 흔적 없고
상심한 짐승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여러날
그동안 너무 뜨거웠으므로
딱딱한 찻잎을 눅이며 천천히 열기를 낮추는 다기처럼
나도 몸을 눅이며 가만히 눈을 감는다 *
* 도종환시집[사월 바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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