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십일월 - 이재무

효림♡ 2018. 11. 1. 09:00

* 십일월 - 이재무 

십일월은 의붓자식 같은 달이다.

시월과 십이월 사이에 엉거주춤 껴서

심란하고 어수선한 달이다

난방도 안 들어오고

선뜻 내복 입기도 애매해서

일 년 중 가장 추운 달이다

더러 가다 행사가 있기는 하지만

메인은 시월이나 십이월에 다 빼앗기고

그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허드레 행사나 치르게 되는 달이다

괄호 같은 부록 같은 본문의 각주 같은

산과 강에 깊게 쇄골이 드러나는 달이다

저녁 땅거미 혹은 어스름과 잘 어울리는

십일월을 내 영혼의 별실로 삼으리라 *

 

* 뒤적이다

망각에 익숙해진 나이

뒤적이는 일이 자주 생긴다

책을 읽어가다가 지나온 페이지를 뒤적이고

잃어버린 물건 때문에

거듭 동선을 뒤적이고

외출복이 마땅치 않아 옷장을 뒤적인다

바람이 풀잎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햇살이 이파리를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달빛이 강물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지난 사랑을 몰래 뒤적이기도 한다

뒤적인다는 것은

내 안에 너를 깊이 새겼다는 것

어제를 뒤적이는 일이 많은 자는

오늘 울고 있는 사람이다

새가 공중을 뒤적이며 날고 있다 *



* 너무 큰 슬픔
  눈물은 때로 사람을 속일 수 있으나
슬픔은 누구도 속일 수 없다. 너무 큰 슬픔은 울지 않는다. 눈물은 눈과 입으로 울지만 슬픔은

어깨로 운다. 어깨는 슬픔의 제방. 슬픔으로 어깨가 무너지던 사람을 본 적이 있다. *

 

* 비 울음

비 오는 밤 창문을 열어놓고

 

손 뻗어 빗소리를 만져봅니다

 

가만히 소리의 결을 하나둘 헤아려봅니다

 

소리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소리 속에 집 한 채를 지을까 궁리합니다

 

기실 빗소리는 땅이 비를 빌려 우는 소리입니다

 

저렇게 밤새 울고 나면

 

내일 아침 땅은 한결 부드럽고

 

깨끗한 얼굴을 내보일 것입니다

 

비 오는 밤 창문을 열어놓고

 

손 뻗어 땅의 울음을 만져봅니다 *

 

 

* 폭포

울고 싶을 때
소리 내어 크게 울고 싶을 때
폭포를 찾아간다
나신으로 우뚝 서서,
천지 분간을 모르고
낮밤 없이 뛰어내리는
투명한 울음들
사정없이 휘둘러대는
하얀 회초리
질정 없이 흔들리는 마음
실컷 두들겨 맞기 위해
폭포를 찾아간다
폭포는 산의 감정
폭포가 아니었다면
산도 자주 안색을 바꾸었을는지 모른다 *

 

* 리어카 바퀴

리어카 바퀴를 보면 숙연해진다
자전거 바퀴를 보면 경쾌해지고
오토바이, 자동차, 기차 바퀴를 보면 어지럽고 섬뜩해진다
세상은 갈수록 빠르게 구르는 바퀴를 선호하지만
나는 리어카 바퀴를 따르고 싶다
힘들이지 않으면 구르지 않는,
사람의 걸음과 보폭이 나란한,
짐의 무게에 민감한,
오르막길엔 끙끙대며 땀을 뻘뻘 흘리다가도
내리막길엔 제법 속도를 낼 줄 아는,
평지에서도 표정이 없는,
추월을 모르는,
새치기하지 않는,
고지식한,
여생을 나는 저 바퀴와 함께 하리라 *


 

* 길

ㅡ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으나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된다.*

 

오래전 선생께서 걸어가신 길을 뒤따릅니다


이 길은 평평한 대로가 아니라 좁고 가파른 외길입니다

 

큰물 만나 끊어지기도 하고 걷다가 쓰러지기도 하는 길입니다


한참을 걸어온 이가 되돌아가기도 하는 길입니다


떠들면서 걷는 길 아니라 골똘히 생각에 잠겨 걷는 길입니다


저 혼자만의 안위보다 가난하고 서러운 이웃 걱정하며 걷는


세상에서 가장 의롭고 정의로운 길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행인 드물어 외롭지만


내일은 많은 이들 함께 걸어가는 길을 꿈꾸는 길입니다 *

* 루신의 단편[고향]에서의 마지막 구절.

 

* 이재무시집[슬픔은 어깨로 운다]-천년의시작,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