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해당화 - 한용운

효림♡ 2008. 6. 12. 09:26

    

* 해당화 - 한용운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 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

 

* 해당화 - 이용악

백모래 十里벌을

사뿐사뿐 걸어간 발자국

발자국의 임자를 기다려

해당화의 순정은

해마다 붉어진다 *

 

* 해당화 - 심훈

해당화 해당화 명사십리 해당화야
한 떨기 홀로 핀 게 가엾어서 꺾었더니
네 어찌 가시로 찔러 앙갚음을 하느뇨.
빨간 피 솟아올라 꽃입술에 물이 드니
손끝에 핏방울은 내 입에도 꽃이로다
바닷가 흰 모래 속에 토닥토닥 묻었네 *

 

* 해당화 심던 날 - 김종해

해당화는 흰 치마를 입고 있다
남양주에서 온 그 여자
한때 바다와 동거했던 그 여자
가녀린 발목에 모래가 묻어 있고
달빛을 업고 서 있는 여자
알몸이 눈부시다
서오릉 언덕 아래
해당화를 심은 날 밤
밤새도록 파도 소리 들리고
내 발목에도 모래가 묻어 있다 *

 

* 해당화 - 박형준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무덤 같은

밥그릇을 아랫목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내 어린 발은

따뜻한 무덤을 향해

자꾸만 뻗어 나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배고픔보다 간절한 것이

기다림이라는 듯이

달그락달그락하는 밥그릇을

더 아랫목 깊숙이 파묻었습니다

 

밥그릇은 내 발이 자라나는 만큼

아랫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내 발이 아랫목까지 닿자

나는 밥그릇이 내 차지가 될 줄 알았습니다

쫓길 데가 없어진 밥그릇은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습니다

 

봄이 되자 나는 밥그릇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습니다

설령 밥그릇이 있다 해도

발이 닿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나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밥그릇의 따뜻한 온기보다 더한

여름이 내 앞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쉽게 시골 소년에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사나운 잠에 떠밀리다

문지방에 어른거리는 것이 있어

방문을 여니,

해당화꽃 그늘이었습니다

뿌리에서부터 막 밀고 나온 듯,

묵은 만큼 화사해진다는

처음 꽃 핀,

삼년생 해당화 붉은 꽃이었습니다

 

거기에 어느새 늙은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저녁 바람에 달그락거리는 밥그릇처럼

해당화꽃 그늘 속에 서 계신

어머니는 허리가 굽은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꼭 가슴에서 무언가를 꺼내느라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라졌던 밥그릇은 어머니의 가슴속에

묻혀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늙은 어머니의 손에서 떠난 그 작은 무덤들이

붉디붉은 꽃으로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 

* 박형준시집[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