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노을 - 조태일

효림♡ 2008. 8. 26. 08:35

* 노을 - 조태일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사람들은 누구나

해질녘이면 노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서성거린다.

 

쌀쌀한 바람 속에서 싸리나무도

노을 한 폭씩 머리에 이고

흔들거린다.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누가 서녘 하늘에 불을 붙였나.

그래도 이승이 그리워

저승 가다가 불을 지폈나.

 

이것 좀 봐.

이것 좀 봐.

 

내 가슴 서편 쪽에도

불이 붙었다. *

* 신경림엮음[처음처럼]-다산책방 

 

* 국토서시(國土序詩)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

* 애송시100편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

 

* 소멸

산들과 잠시나마

고요히 지내려고

산에 오르면

 

산들은 저희들끼리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한점 티끌도 안 보이게

나를 지운다. *

* 조태일시집[혼자 타오르고 있었네]-창비

 

* 이슬 곁에서

안간힘을 쓰며
찌푸린 하늘을
요동치는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저 쬐그만 것들

작아서, 작아서
늘 아름다운 것들,

밑에서 밑에서
늘 서러운 것들. *
 

 

* 단풍  
단풍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제 몸처럼 뜨거운 노을을 가리키고 있네

 

도대체 무슨 사연이냐고 묻는 나에게

단풍들은 대답하네

이런 것이 삶이라고

그냥 이렇게 화르르 사는 일이 삶이라고

 

* 눈보라 치는 날 - 國土 21  

별안간 눈보라가 치는 날은

처음엔 풍경들은 풍경답게 보이다가는

형체(形體)들은 끝내 소리도 없이 묻힌다.

 

눈보라가 치는 날은 술을 마시자.

술을 마시되 체온을 생각해서 마시자.

눈보라가 치는 날은 술을 마시자.

술을 마시되 야간의 낭만을 위해서

국경선을 떠올리며 마시자.

눈보라가 치는 날은 술을 마시자.

술을 마시되 실어증(失語症)을 염려해서

두근거리는 가슴 열고 홀로라도

열심히 말을 하며 마시자.

 

눈보라가 치는 술이 없으면 어찌하나,

눈보라가 치는 국경선이 떠오르면 어찌하나,

눈보라가 치는 두근거리는 가슴 없으면 어찌하나,

신문지 위에나 교과서 위에다가

술잔을 그리고 새끼줄이라도 일이다.

앨무새 입부리라도 그리고

ㄱㄴㄷㄹㅁ ㅂㅇㅈㅊㅋㅌㅍㅎ,

이런 자음(子音)이라도 열심히 그릴 일이다.

신문이나 교과서의 글씨가 보일 때까지

눈이 침침할 때까지, 뒤집힐 때까지

그리고 그릴 일이다.

 

눈보라가 치는 날은

처음엔 풍경들은 풍경답게 보이다가는

그 형체들은 끝내 소리도 없이 묻히니.....*  

 

* 보리밥

건방 지고 대창처럼 꼿꼿하던
푸른 수염도 말끔히 잘리우고
어리석게도 꺼멓게 익어버린 보리밥아
무엇이 그렇게도 언쩒고 아니꼬와서
나를 닮은 얼굴을 하고
끼리끼리 붙어서
불만의 살갗을 그렇게도 예쁘게 비비냐
무릎을 꿇고 허리를 꺾어
하염없이 나희들을 보고 있으면
너는 너무도 엄숙해서
농담은 코끝에서 간지러움으로 피고
가슴속엔 더운 북풍이 인다.
너희들이 쾅쾅 칠 땅은 없고
바람 끝에나 매달리면 어울릴 땀을
다 뒤집어쓰고 나더러는
고추장이나 돼라 하고 나더러는
아무 데서나 펄럭일 깃발이나 돼라 하고
탱자나무 울타리 위에
갈기갈기 찢겨 널리던 바람처럼
활발하게 살아라 하느냐
멍청한 보리밥아
똑똑한 보리밥아 *

 

* 태안사 가는 길 1

나라가 위태로왔던 칠십년대 말쯤
아내와 어리디어린 세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 떠난 지 삼십년 만에
내가 태어났던 태안사를 찾았다.

여름 빗속에서 칭얼대는
아이들을 걸리며 혹은 업으며
태안사를 찾았을 때
눈물이 피잉 돌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임신년 겨울,
팔십을 바라보는 어머님을 모시고
아내와 이젠 웬만큼 자란 아이들을 데리고
터벅터벅 태안사를 찾았을 땐

백골이 진토 된
증조부와 조부와 아버님이
청화 큰스님이랑 함께
껄껄걸 웃으시며
우리들을 맞았다.

 

* 고개 숙인 부처  

나는 결과부좌를 틀고앉아

부처님과 미소짖기 시합을 한다.

 

고요함의 극치지만

미소들이 폴폴폴 날아다니다 멈추는 곳  

내 유년의 발걸음들도 멈추는 곳,

 

이곳에 내리는 눈도 미소다

이곳에 내리는 비도 미소다

이곳에 내리는 햇살도 미소다

 

고개숙인 부처님과

고개 든 나는

미소로 만나

미소로 헤어진다.


* 동행

삼십년을 떠돌다가

광주에 들러

친구 석무를 차고

고향 찾아가는 길

 

가다 가다 더위에 지치고

몰아치는 어린 시절이 숨가빠서

옷 벗어 바위에 던지고

동리천에 뛰어들어

 

금세 얼어붙는 성년을 덜덜 떨며

머리 위로 스치는 소리

물고기 맨살 간지르는 소리 듣는다.

 

침묵으로 고향길 밟는 발바닥

어렸을 적 내 발가락 부딪쳐 피내던

돌부리 하나하나 떠올리며

대창 부딪치는 소리 꽂히는 소리

쓰러지는 비명소리 들으며

 

착한 짐승 거느리듯

친구 석무를 뒤에 거느리고

어른을 버리고,

아장걸음으로 고향길 걷는다. *

* 양병호저[그리운 詩, 여행에서 만나다]-박이정 

 

* 가을 앞에서

이젠 그만 푸르러야겠다.  

이젠 그만 서 있어야겠다.  

마른풀들이 각각의 색깔로

눕고 사라지는 순간인데

나는 쓰러지는 법을 잊어버렸다.  

나는 사라지는 법을 잊어버렸다.  

 

높푸른 하늘속으로 빨려가는 새.  

물가에 어른거리는 꿈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

* 양병호저[그리운 詩, 여행에서 만나다]-박이정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달새 - 정지용  (0) 2008.09.01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 박우현  (0) 2008.08.29
청춘 - 사무엘 울만   (0) 2008.08.22
저녁빛 - 남진우  (0) 2008.08.21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0) 2008.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