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녁빛 - 남진우
붉은 저녁해 창가에 머물며
내게 이제 긴 밤이 찾아온다 하네......
붉은빛으로 내 초라한 방안의 책과 옷가지를 비추며
기나긴 하루의 노역이 끝났다 하네......
놀던 아이들 다 돌아간 다음의 텅 빈 공원 같은
내 마음엔 하루 종일 부우연 먼지만 쌓이고......
소리 없이 사그라드는 저녁빛에 잠겨
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먹임에 귀기울이네......
부서진 꿈들......
시간의 무늬처럼 어른대는 유리 저편 풍경들......
어스름이 다가오는 창가에 서서
붉은 저녁에 빰 부비는
먼 들판 잎사귀들 들끓는 소리 엿들으며
나
잠시 빈집을 감도는 적막에 몸을 주네...... *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마음산책
* 월식
달을 따기 위해
지붕에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올라간 아이와
달을 건지기 위해
두레박을 타고 우물 속으로 내려간 아이가
이 밤
저 달에서 만나 서로 손을 맞잡는다
우물에 떠 있는 달 속으로
지금 막 올라간 아이가
달을 따 들고
지붕 밑으로 내려온다
* 남진우시집[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문학과지성사,2006
* 모자 이야기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아무도 산토끼를 끄집어낼 수는 없다
내 낡은 모자 속에 담긴 것은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일 뿐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사람들은
파도소리도 바람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깊은 밤 내 낡은 모자에 귀를 갖다대면
기적소리와 함께 시커먼 화물열차가 달려나오기도 한다
내 낡은 모자를 안고 오늘 나는 시장에 갔다
하지만 해 저물도록 아무도 사는 이 없어
나는 구름과 놀다가 기차를 타고 훌쩍
머나먼 사막으로 떠났다
누군지 모르는 그대여
내 낡은 모자를 사다오
달리는 화물열차 끝에 매달려 오늘도 나는
내 모자를 쓸 그대를 찾아헤맨다 *
* 꿀벌치기의 노래
내 가슴의 벌집 속엔 꿀 대신 피가 가득 고여 있지
귀 기울여봐, 검은 벌들이 잉잉대며
심장 속에서 날아다니는 소리를
밤이면
소리없이 다가온 그림자가 내 가슴을 열고
벌집 속에 검은 피로 밝힌 등불을 켠다 *
* 남진우시집[사랑의 어두운 저편]-창비,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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