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수(刺繡) - 허영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靑紅)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르른다,
남향 햇볕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번뇌(世事煩惱)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내올 듯
머언
극락정토(極樂淨土)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
* 완행열차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
* 겨울 햇볕
내가 배고플 때
배고픔 잊으라고
얼굴 위에 속눈썹에 목덜미 께에
간지럼 먹여 마구 웃기고
또 내가 이처럼
북풍 속에 떨고 있을 때
조그만 심장이 떨고 있을 때
등어리 어루만져 도닥거리는
다사로와라
겨울 햇볕! *
* 긴 봄날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눈물겹기야
어찌
새 잎뿐이랴
창궐하는 역병(疫病)
죄(罪)에서조차
푸른
미나리 내음 난다
긴 봄날엔ㅡ
숨어 사는
섧은 정부(情婦)
난쟁이 오랑캐꽃
외눈 뜨고 내다본다
긴 봄날엔ㅡ *
* 봄밤
꽃피는 봄밤에는
마음도 열리거라//
옛날에 앓던 病
새로 또 아려오고//
옛날에 기쁘던 일
새로 눈물겨웁구나//
임의 말씀 들리는
꽃피는 봄밤//
목숨이 목숨이
이토록 향그른 밤 *
* 간이역
서러운 기다림
사철 꽃으로 피고 지련만
잘 가라고
잘 가라고만
---푸른 신호등
잊지 않고 돌아오겠노라
굳은 언약도 있으련만
잘 가라고
잘 가라고만
-----푸른 신호등 *
* 감
이 맑은 가을 날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 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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