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자수(刺繡) - 허영자

효림♡ 2008. 11. 8. 21:07

* 자수(刺繡) - 허영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靑紅)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르른다,

 

남향 햇볕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번뇌(世事煩惱)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내올 듯

 

머언

극락정토(極樂淨土)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

 

* 완행열차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

 

* 겨울 햇볕 
내가 배고플 때
배고픔 잊으라고
얼굴 위에 속눈썹에 목덜미 께에
간지럼 먹여 마구 웃기고
또 내가 이처럼
북풍 속에 떨고 있을 때

조그만 심장이 떨고 있을 때
등어리 어루만져 도닥거리는
다사로와라
겨울 햇볕! *

 

* 긴 봄날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눈물겹기야
어찌
새 잎뿐이랴

창궐하는 역병(疫病)
죄(罪)에서조차
푸른
미나리 내음 난다
긴 봄날엔ㅡ

숨어 사는
섧은 정부(情婦)
난쟁이 오랑캐꽃
외눈 뜨고 내다본다
긴 봄날엔ㅡ *

 

* 봄밤

꽃피는 봄밤에는

마음도 열리거라//

옛날에 앓던 病

새로 또 아려오고//

옛날에 기쁘던 일

새로 눈물겨웁구나//

임의 말씀 들리는

꽃피는 봄밤//

목숨이 목숨이

이토록 향그른 밤 *

 

* 간이역 
서러운 기다림
사철 꽃으로 피고 지련만
잘 가라고
잘 가라고만
---푸른 신호등

잊지 않고 돌아오겠노라
굳은 언약도 있으련만
잘 가라고
잘 가라고만
-----푸른 신호등 *
 
 

 

* 감

이 맑은 가을 날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 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 밖에는.....*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 이성진  (0) 2008.11.11
천은사에서 - 권오표  (0) 2008.11.08
겨울사랑 - 문정희  (0) 2008.11.07
인연설 - 한용운  (0) 2008.10.29
연가(戀歌) - 신중신  (0) 2008.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