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은사(泉隱寺)에서 - 권오표
다 두고 오게
그저 빈 손으로만 오게
천왕봉 골짜기를 타고 와
겨드랑 밑 잠든 상채기를 할퀴는 바람도
섬짐강 물줄기를 오르는 은어떼
투명한 몸둥이에 머무는
저리 눈부신 한 웅큼 햇살마저도
다 두고 가게
그저 빈손으로만 가게
경인년이던가 시린 하늘 아래
미처 눕지 못한 넋들
떡갈나무에 걸린 낮달 하나
풀섶 아래 묻으면
추녀 끝에 흔들려 우는 풍경
비로소 저 혼자 저무는 대웅전을
비질하는 독경소리
다 두고 오게
다 두고 가게 *
* 처서 무렵 노을은
처서 무렵의 노을은 산비탈 밭머리
고개 꺾인 수수 모가지 사이로 든다
까치발로 서서 발등 부비며 서걱이는
수수 잎사귀 틈으로 온다
빈 도시락을 어깨에 맨 채 달그락거리며
신작로를 따라오던 유년의 긴 그림자
처서 무렵에는 일등만 맡아 하는 반장처럼 당당하던 플라타너스도
동네 우물가 풋감 떨어지는 소리에 오소소 몸을 떨고,
산다는 건 아궁이의 다 닳은 부지깽이처럼
그저 참고 또 견디는 것
사람들은 야위어가는 하구의 물그림자에
지난 여름의 생채기를 말없이 실어 보낸다
처서 무렵의 노을은 들 일 마친 늙은 아버지의
삼베 잠뱅이를 지나
밥물 넘는 저녁 연기 사이로 고개 떨구며 온다
그대 푸르름에
나는 더욱 목마르다
밤에 능소화 지는 소리
어둠을 흔들더니
미처 달아나기 못한 바람만
자꾸 무릎에 쌓인다
보름째 비는 오지 않고
오늘은 빈 처마에
등이나 하나 매달고 그냥
흔들려야겠다
* 마흔 여섯의 길 건너기
갓길없음
안개주의
* 새
그대 만나고
꿈꾸는 날 많아졌다
아득한 지평선 끝
휘파람 날리면
무수히 흐르는 발자국
비상의 시름과
낙하의 기쁨 사이
그대 눈물이 어째서
내 가슴을 적시는가
저무는 강기슭에
둥지 하나 틀지 못하는 우리
어느 하늘 가장자리에서
깃을 접어야 하나
그대 만나고
꿈꾸는 날 많아졌다* 권오표 시인
-1950년 전북 순창 출생
-1992년 [시와 시학] 신인상에 당선
-시집 [여수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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