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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에서 - 권오표

효림♡ 2008. 11. 8. 21:11

* 천은사(泉隱寺)에서 - 권오표  

다 두고 오게

그저 빈 손으로만 오게

 

천왕봉 골짜기를 타고 와 

겨드랑 밑 잠든 상채기를 할퀴는 바람도

섬짐강 물줄기를 오르는 은어떼

투명한 몸둥이에 머무는

저리 눈부신 한 웅큼 햇살마저도

 

다 두고 가게

그저 빈손으로만 가게

 

경인년이던가 시린 하늘 아래

미처 눕지 못한 넋들

떡갈나무에 걸린 낮달 하나

풀섶 아래 묻으면

추녀 끝에 흔들려 우는 풍경

비로소 저 혼자 저무는 대웅전을

비질하는 독경소리

 

다 두고 오게

 

다 두고 가게 *

 

* 처서 무렵 노을은 
처서 무렵의 노을은 산비탈 밭머리
고개 꺾인 수수 모가지 사이로 든다
까치발로 서서 발등 부비며 서걱이는
수수 잎사귀 틈으로 온다
빈 도시락을 어깨에 맨 채 달그락거리며
신작로를 따라오던 유년의 긴 그림자
처서 무렵에는 일등만 맡아 하는 반장처럼 당당하던 플라타너스도
동네 우물가 풋감 떨어지는 소리에 오소소 몸을 떨고,

산다는 건 아궁이의 다 닳은 부지깽이처럼
그저 참고 또 견디는 것
사람들은 야위어가는 하구의 물그림자에
지난 여름의 생채기를 말없이 실어 보낸다
처서 무렵의 노을은 들 일 마친 늙은 아버지의
삼베 잠뱅이를 지나
밥물 넘는 저녁 연기 사이로 고개 떨구며 온다


* 목마른 날에 
그대 푸르름에
나는 더욱 목마르다
밤에 능소화 지는 소리
어둠을 흔들더니
미처 달아나기 못한 바람만
자꾸 무릎에 쌓인다
보름째 비는 오지 않고
오늘은 빈 처마에
등이나 하나 매달고 그냥
흔들려야겠다

 

* 마흔 여섯의 길 건너기 
갓길없음

안개주의

 

* 새 

그대 만나고

꿈꾸는 날 많아졌다

아득한 지평선 끝

휘파람 날리면

무수히 흐르는 발자국

비상의 시름과

낙하의 기쁨 사이

그대 눈물이 어째서

내 가슴을 적시는가

저무는 강기슭에

둥지 하나 틀지 못하는 우리

어느 하늘 가장자리에서

깃을 접어야 하나

그대 만나고

꿈꾸는 날 많아졌다

* 권오표 시인
-1950년 전북 순창 출생

-1992년 [시와 시학] 신인상에 당선 
-시집 [여수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