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 정일근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
* 정일근 시집 [기다린다는것에대하여]-문학과지성사
* 회향(廻向)
통도사 경봉 큰스님 쓰신 선묵 중에
예순 나이에 시작해 아흔 나이에 끝을 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 있다
그 경전을 쓰신 글씨에는
예순엔 쟁쟁쟁 날이 우는 칼소리가 나고
칠순엔 잘 자란 큰 나무소리가 뿜어 나오고
팔순엔 맑디맑은 물소리가 들린다
아흔에닿아서는그 소리들 모두 다 사라지고
서너 살 아이들 처음 쓰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그 아이들 웃는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로
일은 해 먹을 갈아 붓을 들어 쓰신 묵향이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가 웃으며 풀어진다
그 경전 위대한 지혜에 이르는 마음의 경이라 했다
반야바라밀다는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라 했다
주문의 길을 몸으로 따라 가다 읽고 만나는
관자재보살, 우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앞에
나는 스스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다 *
* 경봉스님(鏡峰 1892~1982)
이국의 여자와 내가 말이 통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이 사랑이 꿈인 줄 알았다. 깰까 싶어 두려운 꿈속
우리는 원형의 알타이어(語)로 사랑의 말을 주고받았고
사랑으로 입 안의 혀는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이 여자는 언제부터 내 마음을 따라왔던 것일까
이슬라마바드를 떠나올 때나 캐리코럼 하이웨이를 달릴 때에도
눈빛 맞출 여자 하나 보지 못했는데
돈황 석굴의 어둠 같은 깊은 눈빛으로
투루판(吐魯番)의 여름 포도 향기 같은 달콤함으로
음악처럼 나에게 감겨드는 이 여자는 누구인가
우루무치에서의 사랑으로 나의 피는 수평을 잃어버렸고
여자의 낮고, 아득하고, 뜨거운 곳으로
나는 사마르칸트산(産) 한지에 스미는 물처럼 천천히 침윤했다
여자의 몸에 감긴 비단을 벗겨낼 때마다
벗겨진 비단이 서쪽으로 길을 만들고
그 길 따라 낙타 무리가 돌아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이 사랑의 끝을 알 수 있었다
꿈에서 깨고 나면 여자는 돈황의 석굴 속으로 떠나고 없을 것이다
나는 우루무치 낡은 삔관(賓館)에서 늦은 아침잠을 깰 것이고
입 안 가득 여자가 남긴 비단길의 뜨거운 모래만 남아 씹힐 것이다
인연이 있다면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 박물관에서
미라로 남은 천년 전 여자를 나는 다시 만날 것이지만
그때는 아마 우루무치에서의 불 같은 이 사랑
차가운 얼음이 되어 모두 잊었을 것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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