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고두현

효림♡ 2009. 5. 15. 08:15

* 부석사 봄밤 - 고두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가만히 손 대고 눈 감다가
일천이백 년 전 석등이
저 혼자 타오르는 모습
보았습니다
하필 여기까지 와서
실낱같은 빛 한줄기
약간 비켜선 채
제 몸 사르는 것이
그토록 오래 불씨 보듬고
바위 속 비추던 석등
잎 다 떨구고 대궁만 남은
당신의 자세였다니요 *

 

*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 여름 푸른 상처
온몸으로 막아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은점 지나 노구 지나 단감빛으로 물드는 노을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리 해안 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채는 파도
그렇게 돌아앉아 있지만 말고
속 타는 저 바다 단풍드는 거 좀 보아요. *

* 고두현시집[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랜덤하우스중앙


* 늦게 온 소포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

* 고두현시집[늦게 온 소포]-민음사

 

* 옻닭 먹은 날

유난히 눈을 좋아하는 그대

예쁜 손목 잡고 싶을 때

행여 차가울까

 

옻닭 먹으면 추위 덜 탄다는
그 말이 더 따뜻하고 고마워서
생옻닭 국물 한껏 마셨네.


새벽이 되자 마음이 가려웠네.

등도 배도 가슴도

옻 오른 팔목도 붉게 탔네.

아침까지 온몸 가득 꽃 피는 들판

햇빛마저 쏟아붓네.

 

이렇게 뜨거운 것들이 모여
바알갛게 익은 꽃들을 피우고 나면
얼마나 깊은 열매 맺을까 그 열매

땅으로 내려 그리운 뿌리까지 가 닿고 난 뒤엔

또 어떤 꽃이 그대 앞에 필까.
꽃 지고 열매 지고 뿌리까지 지고 난 뒤에도
변함없이 겨울은 오고 눈은 내리고

설국을 사랑하는 그대 손끝까지
부드럽고 따숩게 가 닿기 위해
마디마디 손금 데우며
혼자 화끈거리는데

아 그토록 차가웠나
내 손 내 몸 내 마음

설국까지 가기 전에
내 몸이 먼저 하얘지네
눈시울 붉어지네
너무 오래 외로워서 손발 시린 세상도
이렇게 한번 덥혀졌으면
한겨울 오기 전 타는 그리움

그대 흰 손 잡아보려
내 손 아프게 데우는 연습

* 고두현시집[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랜덤하우스중앙


* 발왕산에 가보셨나요

용평 발왕산 꼭대기
부챗살 같은 숲 내려다보며
곤돌라로 훌쩍 올랐더니
전망대 이층 식당 벽
여기 누구 왔다 가노라  
빼곡하게 걸린 이름 가운데 
통 잊을 수 없는 글귀 하나.

'아빠 그동안 말 안드러서
좨송해요. 아프로는 잘 드러께요'

하, 녀석이 

어떻게 눈치챘을까.
높은 자리에 오르면
누구나 다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걸. *

 

* 수연산방에서 -[무서록]을 읽다

문향루에 앉아 솔잎차를 마시며

삼 면 유리창을 차례대로 세어본다

한 면에 네 개씩 모두 열두 짝이다

 

해 저문 뒤

무서록을 거꾸로 읽는다

 

세상일에 순서가 따로 있겠는가

저 밝은 달빛이 그대와 나

누굴 먼저 비추는지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누구 마음 먼저 기울었는지

무슨 상관있으랴

 

집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에 앉은 동산도 두 팔 감았다 풀었다

밤새도록 사이 좋게 노니는데

 

시작 끝 따로 없는

열두 폭 병풍처럼 우리 삶의 높낮이나

살고 죽는 것 또한

순서 없이 읽는 사람이

먼 훗날 또 있으리라. *  

* 수연산방-소설가 이태준이 살던 성북동 옛집

* 무서록-이태준의 수필집. 순서 없이 엮은 글이라 하여 붙인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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