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매미 - 고영조

효림♡ 2009. 5. 17. 11:44

* 매미 - 고영조   
굴암산 늙은 떡갈나무 몸뚱이에
배를 붙이고 노래하는 매미들
여름은 얼마나 즐거우냐고
세상의 청맹과니들이여
제 몸의 노예들이여
이 노래 들어보라고
아랫배에 힘주고 운다
지나가던 산들바람
그 노래 더 멀리 울려 퍼지라고
세상의 노예들이여
모두 모두 노래하고 잘 노시라고
떡갈나무 푸른 잎을 슬쩍 슬쩍
들어 올리고 있다 *
* 고영조시집[귀현리에서 관동리로]-경남

 

* 자운영  

이맘때는

화개장터 가는 길

자운영 꽃밭으로 가서

꽃잎에 새털구름

얼비치듯

아름답게 섞이고 싶다

붉은 구름이불 덮고

몸과 몸을 부딪치며

살과 살을

섞고 싶다

봄날 들판에 어지러이

가슴 풀어헤친 꽃밭들

뜨거운 몸 위에

얼굴을 묻고

누군가 누구였던가

목마른 가슴 안고

온몸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

 

* 말똥비름  

말똥비름꽃을 보셨나요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두 손을 활짝 펴고

저녁별처럼 깔깔 웃는

노란 꽃을 아시나요

길섶에 제 뜻대로 피어있는

얼굴 부비고 싶은 촌놈을

개똥이라 부르듯

저 홀로 무너진 논둑을

아름답게 덮는 그 꽃

무심한 말똥비름을 보셨나요

이 땅의 상처를 덮은

가난한 마음들을 아시나요 * 

* 고영조시집[고요한 숲]-고려원

 

* 나팔꽃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시와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해서

이 어둠과 혼돈 속에서도

결코 수다스럽게 말하지 않는다

흐르는 달빛 속에서

하얀 손 은은히 내밀어

내가 그 손을 잔잔히 잡게 할 뿐

물방울 꽃잎에 맺혀

스스로 한마디 말을 엮어가듯

그녀는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해

몇겹으로

말하지 않는다

 

* 다리  

전화가설공 김씨는 공중에 떠있다. 그는 허공을 밟고 활쏘는 헤라클레스처럼 남쪽하늘을 팽팽히 잡아당긴다. 당길 때마다 봄 하늘이 조금씩 다가왔다. 공중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 들린다. 사랑해요. 화살처럼 달려가는 중이다. 붉은 자켓을 펄럭이며 그는 지금 길을 닦는 중이다. 하늘을 가로질러 푸른 다리를 놓는 중이다. 제비들이 어깨를 밟을 듯 지저귄다. 그는 허공과 허공 사이에 케이블을 걸고 벚나무 가지가 붉어질 때까지 죽은 기억들을 끌어당긴다. 허공을 밟을 때마다 목조계단이 바스라지며 가슴을 찌른다. 모든 언덕이 팽팽해진다. 살아오는 중이다. 말과 말 사이에 물길이 트이는 중이다. 중심이다. 닿을 수 없는 마음들이 물길에 실려 가는 것이 보인다. 그는 지금 허공을 밟으며 그대에게로 가는 푸른 다리를 놓는 중이다.

 

* 하지정맥류 

아내는 하지정맥류를 앓고 있다 푸른 지렁이들이 종아리를 퍼렇게 감고 있다 그는 너무 오래 서 있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풀썩 주저앉지 않으려고 바위틈에 뿌리를 깊게 박고 서 있었다 너무 오래 서 있었다고 몸이 일러준 것이다 일전에 갔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도 둥근 몸이군데군데 깨어져 있었다 그도 무거운 지붕을 이고 너무 오래 서 있었다. 한 손에 약병을 들고 계신 약사여래께서도 그러하셨다 치맛자락으로 푸른 종아리를 감추시던 어머니도 그러하셨다 떠나신 지 30년이 지났어도 커다란 함지박을 이고 아직도 대문간에 서 계셨다 어머니는 언제나 서계셨다 푸른 지렁이들이 종아리를 퍼렇게 감을 때까지 그들은 너무 오래서 있었다 *

 

* 등불  
[먼 길을 가다가 어두어지면
등불을 켜고 간다]
이 쉬운 말을 아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까
가진 짐이 무거우면
땅위에 내려놓으면 된다
높은 곳이 어지러우면
주저없이 땅으로 내려오면 된다
등불을 켜고 가다 밝아지면
등불을 끄고
그냥 가던 길을 가면 된다
켜고 끄는 마음조차도 없이
먼 길을 먼 마음으로
묵묵히 가면 된다
거기에 등불이 있다
이 쉬운 뜻을 아는데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까 *

 

* 안과 밖 

내가 당신을 생각할 동안

당신은 늘 내 바깥에 있었다


내가 당신을 까맣게 잊고 있을 동안

당신은 내 안에 깊이 숨어 있었다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바깥일까 *

 

* 불빛 

노파가 끄는 리어카를
조무래기들이 깔깔거리며
밀고 갑니다
명아주 꽃들이 비탈길을 따라
하얀 이빨을 반짝거렸습니다
오, 저렇게 작은 불빛들이
산동네 마을 하나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 

 

* 강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면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더없이 거룩하다

그 거룩함으로

저녁강의 겨울철새들

보면 어떠리

물닭, 넓적부리, 가창오리들

저 작은 몸으로 수만리 날아와서

이 땅의 흩어진 밀알을 쪼으는

목숨들의 깊고 높음

보면 어떠리

얼어붙은 강 위에서

사람과 새들이 함께 투명할지니

사람과 새들이 한 몸으로 반짝일지니

붉은 노을 지는 수면 가득히

검은 산이 거대한 철새처럼 내려앉는

바로 이 순간에

우리가 다시 사랑한다면

그 사랑 또한 더 없이 거룩하지 않으리 *

 

* 눈 

내리는 날은 그대여

창가에 기대어

말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자

성주사 팔상전 지붕에

소리없이 내리는

늙은 조팝나무를 부드럽게 감싸며

쥐똥나무와

개동백을 어루만지는 눈

우리의 가슴에 지붕을 만들고

그 위에 하얗게 쌓이는 눈을 바라보자

내리는 눈으로 함께 젖으며

오솔길을 따라 가는 젊은 연인들

손잡고 흐르는 저 따뜻한 강물 * 

 

* 함박눈 

밤새 함박눈이 내렸다 쥐똥나무와 개동백 명자나

무 울타리를 하얗게 덮고 있다 그들이 어디에 있었는

지 아무도 모르게 이름들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늘

가던 길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다만 강물만 홀로 깨어

흘러가고 있다 오래전에 이름 없는 나무와 이름 없는

풀들이 있었다 이름 없는 그것들이 아름답다 이름 대

신 몸으로 봐야 눈도 보인다 그 눈을 홀로 보는 새벽

이야말로 축복이다

 

* 저벅저벅   

누가 내 속의

단풍나무를 흔드는가

내 속의 단풍잎을

저벅저벅 밟고 가는가

누가 내 속의 소금배를

짜고 흰 슬픔을

삐걱삐걱 저어 가는가

누가 부서진 의자를

길 밖으로 던져 놓았는가

부서진 어제를 던져 놓았는가

증오와 적개심에 불타던

붉은 단풍나무를

누가 온 몸으로 흔드는가

짜고 흰 슬픔의

깨어지고 버석거리는 몸을

누가 저벅저벅

큰 소리로 밟고 가는가  *

 

* 고영조시인

-1946년 경남 창원 출생
-1986년 [동서문학]등단. 1996년 편운문학상 수상
-시집 [귀현리][고요한 숲][언덕 저쪽에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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