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 도종환

효림♡ 2009. 8. 10. 08:28

*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저녁 햇살 등에 지고 반짝이는 억새풀은 가을 들판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
차가워지는 바람에 꽃손을 비비며 옹기종기 모여 떠는 둘국화나 구절초는
고갯길 언덕 아래에 있을 때에 더욱 청초하다


골목길의 가로등, 갈림길의 이정표처럼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은 보기에 얼마나 좋은가
젊은 날의 어둡고 긴 방황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기 위한 길이었는지 모른다


늦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기나긴 그리움의 나날도 있어야 할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머물 수 없는 마음, 끝없이 다시 시작하고픈 갈증도 내가 지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고 산 그늘이 들판을 걸어내려오는 저녁이면 또다시
막막해져 오는 우리들의 가슴은 아직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일지 모른다

낙엽이 진다
결국은 지쳐서 제자리로 돌아오면서도 꼭 한번만 다시 떠나고픈 출발의 시정이
온 몸을 몸서리치게 감는 저녁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서 더욱 빛나는 삶은 아름답다

 

* 도종환산문집[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한양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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