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래기 - 도종환

효림♡ 2009. 8. 20. 08:21

* 시래기 - 도종환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우리 주위에 시래기가 되어 

생의 겨울을 나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 시래기 한 움큼 - 공광규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식당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 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주먹다짐 한 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미운 인심에게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넘겨져 조서를 받던 그는
찬 유치장 바닥에 뒹굴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
* 공광규시집[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 시래기 - 윤중호

곰삭은 흙벽에 매달려

찬바람에 물기 죄다 지우고

배배 말라가면서

그저, 한겨울 따뜻한 죽 한 그릇 될 수 있다면.

* 시래기 - 이기인       

졸린 눈으로 한숨을 쉬는 시래기가 벽에 걸려 있다

그의 영혼은 일을 하러 나갔다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의 등뼈는 집으로 돌아와 시름시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직도 벽에 걸쳐놓은 굵은 손을 놓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작은 입술로 뼈마디를 주무르며 바스락거린다

온몸의 근육이 파도 물줄기처럼 번져 그의 삶을 거들고 있다

좁다란 어깨에 푸른 노동의 시간이 사이좋게 누워 있다

그의 어깨를 붙잡아서 깨우고 싶은 바람이 오늘은 외치듯이 온다

한시름을 놓은 주름살이 우두커니 허름한 살림을 본다

지친 날개를 한 묶음 껴안은 가슴이 파닥거리고 싶다 *

* 이기인시집[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