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풀 향기 - 박종영

효림♡ 2009. 8. 31. 08:49

 

* 풀 향기 - 박종영

산새의 울음으로 대답을 물어도
새벽이슬 머리에 이고
조용한 숲의 소리로 안아주는
풀의 향기

그, 향기
형용하기 어려운
달작 지근한 맛의 비결은 무엇인가
한 움큼 들이마시면 싱싱한 우주 한 개가
가슴에 차오르고

건드리면 더욱 진하게 퍼지는
그 융숭한 색감의 정취를
한 올 한 올 다듬어
숲과 나무사이에 얹혀놓는다

푸르고 알싸한 칠월의 길목에서
정 깊은 사람들의 포옹은
기어이
풀꽃을 피워내기 시작한다 

 

* 쪽빛 7월 
7월은
남풍으로 다듬어진 무논 두렁마다
가는허리 풀꽃들이
티없는 웃음으로 흔들리고

어느 날
옥색 치마 팔랑이며 이별을 손 흔들던 그대
고운 뒤태 골몰하다
밝은 웃음 넌실대는 흥겨운 시간

화끈거리는 가슴 달래려
헛헛한 마음 감추면
저절로 일어서는 기쁜 웃음소리
강 건너 민들레 꽃 가슴
슬쩍 만지며 달아나고

어느새
누구의 가슴마다 풋풋하게
열리는 쪽빛 7월
 

 

* 보리밥

보리쌀 씻는 물에

구름을 담아 쓱쓱 씻어낸다

 

희디희게 일어서는

뭉게구름

보리쌀 뜨물이 은하수를 만든다

 

질박하게 놓이는

댓돌 딛고 앉아

재진 보리밥 찬물에 말아

한 숟갈 입에 넣으니

 

청보리

엄동을 뚫고 살아오는 듯

오소소 퍼지는 겨울 냄새

 

댄 여름

무딘 뱃속에 시원한

궁전을 짓는구나 *

 

* 봄이 오는 소리 

봄은 부드러운 시간의 호흡이다

겨울잠을 떨치고 힘차게 융합하는

생명들의 움틈이다

메마른 길목에 서면

파란 봄이 오는 소리

가쁜 숨결을 만질 수 있어 좋다

쇠락한 바람 밀치고 돌아온 자리

겨우내 언 땅은

노란 촉 한 개의 성장을 위해

여문 생명의 씨앗을 심는다

차가운 햇볕이 인색하게 빛을 내린다

그제야 몸을 푸는 두꺼운 강물

정녕 겨울이 깊으면 봄은 가까이 오는 것인가?

땅 위에 귀 기울이니

개나리 노란 웃음기로 달려오는 봄의 소리

 

* 가을 서곡 
가을의 첫 노래를 듣는다
문풍지 우는 소리에
한 겹씩 옷을 치장하는 창문 밖으로
새벽바람이 서성댄다

동동한 여름 이겨낸 손끝마다
물들여진 봉숭아 꽃물
누구에게 보이고 싶어 밤을 새운 그리움이
금빛 햇살에 반짝인다
 

나는 무엇으로 이 가을을 대답할까?
담벼락에 등을 대면 서늘한 기운이 일어서고
귀향의 길에서 차진 열매 하나 없이
허망한 가을을 맞아야 하는지를

얻는 것과 버리는 것 모두
풍요하여 탐이 나는 세월
한 움큼 푸른 구름 잡아 툭툭 헹궈내면
가을꽃 향기는 한 줄 이별의 시를 쓴다

 

* 외줄 타는 변산바람꽃
더딘 봄 아침을 연다
여린 가슴 추수려
텃밭에 한 그루 매화가 활짝 피었다
꼭, 누구네 해 맑은 웃음 닮아
혼자 웃고 있는 걸 보니 애처로운 향기다
살며시 그것의 곁으로 서서
색조가 탐이 나는 것은 아직 남은 열정이 있어
탐닉을 반추하려는 욕심일까?
오로지 하얀 웃음을 보기 위해 겨울은 언 강을 건너며
너의 가슴에 따뜻한 시련을 수놓았으리
들꽃이 기지개 켜는 시간은
게으른 농부에게 힘을 실어주는 향기의 구휼이라
굿판이 열리는 봄의 길목에서
외줄 타는 변산바람꽃
오늘, 네 환한 웃음이 슬프게 들리는 것은

늦장 부린 봄

아득한 향기 탓이려니 *

 

* 여름, 개망초 
너, 살아오면서
푸대접으로 서러워한 적
한두 번이던가
무디고 습습한 바람 스쳐갈 때마다
키 큰 몸뚱이 흔들리며
서러움 툭툭 부서지던 개망초
그래도 노란꽃 소리없이 피워내고
간결한 향기 시샘하는 여름 한나절
어느 무서운 낫질에도 꿋꿋하게 이겨내는
너, 계란꽃이여
내 살아온 날의 서러움으로
오늘
네 허리 붙들고 부끄럽구나

 

* 여름, 청명한 소리 위를 걷다 
여름 산의 주인은 녹색의 울림이다
그 첫 번째 소리는 계곡의 물소리다
나뭇잎 부딪치는 풋풋한 소리 그것은, 
산이 들려주는 두 번째 빛나는 청량제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산의 그리움을 달래주는 것은
나무 틈에 숨어 아양 부리는 산새 울음소리,
그거 달콤한 연인의 메아리로 즐겁다
넉넉한 산의 가슴을 딛고 오르는 슬기찬 발걸음들,
고단한 삶이 산을 넘어가는 소리, 
그토록 청명한 소리 위를 걷는 우리 모두
싱싱한 나무의 웃음으로 닮아가기 위해서다
골마다 생명의 소리로 우쭐대는 녹색의 몸짓들, 
언제나 청초함으로 숲과  나무의 간격을 좁히는
바람의 속삭임, 그 아래 산허리 투명하게 휘감는 안개,
첫새벽의 신처럼 슴슴히 박명의 숨소리가
천 년 바위에 새로운 이끼를 새기고,
늦여름 극치의 위안으로 다가오는 초가을 앞에서
희망을 손짓하는 푸른 산을
닮아가는 그대는 과연 누구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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