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世上事)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 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都市)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 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 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려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민음사
* 쌀
쌀은 결코 말하지 않아요
쌀은 결코 노여워하진 않아요
쌀은 정말 흐느끼지도 않아요
쌀은 모든 이들에게 힘을 주지만
자신은 좀처럼 그 힘을 몰라요
쌀은 하얗게 하얗게 숨 쉴 뿐
쌀은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면서
쌀은 가장 참담하게 죽어버려요
가마니 속에서 성냥통 같은 뱃속에서
쌀은 꾸역꾸역 납작하게 죽어버리지만
어허이 고요하게 피를 적셔요
쌀은 멀리멀리 사라져가면서
또 하나의 기막힌 쌀을 남기고
오늘은 차라리 똥이 돼버려요
쌀은 차라리 사랑이 돼버리네요 *
* 강
애인이여
구름을 이고 오는 여름날의
멀고 먼 길을 아는가
얼굴은 나중에 오게 하고
마음은 먼저 보내는
멀리서 흔들리는 가슴을 아는가 *
* 보리밥
나는 뜨끈뜨끈하고도 달작지근한 보리밥이다
남도 끝의 툇마루에 놓인 보리밥이다
금이 가고 이가 빠진 황토빛 툭사발을
끼니마다 가득 채운 넉넉한 보리밥이다
파리떼 날아와 빨기도 하지만
흙 묻은 입 속으로 들어가는 보리밥이다
누가 부러워하고 먹으려 하지 않은
노랗디 노오란 꺼끌꺼끌한 보리밥이다
누룽지만도 못하다고 상하로 천대를 받는
푸른 하늘 밑에 서러운 보리밥이 아닌가
개새끼야 에그후라이를 먹는 개새끼야
물결치는 청보리밭 너머 폐허를 가려면
나를 먹어다오 혁대를 풀어제쳐
땀나게 맛있게 많이 씹어다오
노을녘 한참 때나 눈치 채어 삼키려는
저 엉큼한 놈들의 무변의 혓바닥을 눌러앉아
하늘 보고 땅을 보며 억세게 울고 싶은데
아이구머니나, 어느 흉년이 찾아 들어
누가 참 오랜만에 나를 먹으려 한다
보리밥인 나를 어둑어둑한 뒷구멍으로
재빨리 깊숙이 사정없이 처넣더니
그칠 줄 모르는 방귀만 잘 새어나온다고
돌아서서 다시 퉤퉤 뱉어버린다 *
* 아름다운 것들은 왜 둥글까
어찌하여
아름다운 것들은 둥근 것일까
논에서 자라는 곡식들
밭에서 자라는 보리 밀
콩 녹두 수수알갱이여
저 먼 푸른 벌판으로
흩어진 마음을 불러 모아
훨훨 날개 달아 보내노라면
노래의 둥근 씨앗들이여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의 몸부림이여
어찌하여
뚝뚝 떨어지는 피는 둥글고
또 어찌하여
얼굴을 적시는 눈물
하염없이 흘러내리면서 둥근 것일까
바라보라
밤엔 달이 둥글고 낮에 해가 둥글다!
바라보라
장미꽃은 둥글다
온 산천에 피는 꽃들은 둥글다
논길 밭길 걸어서
떠나는 사람들의 둥근 뒷모습
가을엔 단풍숲 헤쳐 길 찾아가는
사람들의 둥근 이마와 둥근 앞모습
오 검은 눈동자의 찬란한 반짝임!
어찌하여
아름다운 것들을 둥근 것일까
그렇게 둥근 걸일까
총구멍도 둥글다고 하지만
끝없이
흘러내리는 피와 눈물은
저렇듯 붉게, 저렇듯 하얗게 둥근 것일까
논밭 그득히 물결치는 씨앗들처럼 영원히!
* 콩알 하나
누가 흘렸을까
막내딸을 찾아가는
다 쭈그러진 시골 할머니의
구멍난 보따리에서
빠져 떨어졌을까
역전 광장
아스팔트 위에
밟히며 뒹구는
파아란 콩알 하나
나는 그 엄청난 생명을 집어들어
도회지 밖으로 나가
강 건너 밭 이랑에
깊숙이 깊숙이 심어주었다
그때 사방 팔방에서
저녁노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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