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밤길 - 김영재

효림♡ 2009. 8. 28. 08:43

* 밤길 - 김영재    

산이 산을 껴안고

겹겹이 잠드는 밤

우리는 길을 잃고 길 찾아 상처 입는다

그 상처

별이 될 때까지

걷고 또 걷는 밤길

 

산에서 밤을 만나면

육신의 눈 닫힌다

속세의 그리움도 욕망의 겨드랑이도

끊어져

무너져 내리는 밤

빛 삼킨 어둠만 불멸! *

 

* 화엄동백

뚝뚝 목이 지는 화엄사 동백을 만나
일자리 작파하고 유랑하는 친구의 말씀
지리산 반야봉 너머 환한 세상 있것다

천왕봉 상상봉에
매어 놓은 [바람 집 한 채]

바람을 부르면 슬픈 가락이 되고 구름 몰려오면 벼락치는 노한 소나기로

우르릉 쾅쾅, 섬진강 은어떼 뛰듯 철없이 튀어올라 평사리 무논바닥 잡풀

자라듯 그렇게 한시절 살아보려 했는데 절뚝이며 절뚝이며 술잔 비우네

동백은 생살로 목이 뒹굴고
어둠은 말없는 산을 감춘다
 

 

* 우리의 사랑  

이젠 잠들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사랑

다시 물로 만나

나는 너에게로

너는 나에게로

하나가 되나니

저 작은 풀씨조차

떨어져 누운 자리 지키며

얼었던 땅을 뚫고

잎을 피우나니

바람과 추위가 얼리고 간 사랑

사람들은 돌아서서 불빛 속으로 떠나고

우리의 사랑 얼음으로 남아

긴 밤을 떨고 있었나니 

너와 나의 가슴에 얼지 못한 피

목마른 그리움

이젠 잠들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사랑

다시 물이 되어

나는 너에게로

너는 나에게로 * 

 
어머니의 편지

맞춤법이 엉망인
고향에서 온
어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나의 마음은 
웬일일까
가을 들풀처럼
눈물겹다

 

* 소금 창고

내 마음 깊은 곳에

소금 창고 한 칸 짓고 싶다

비좁고 허름하지만

왕소금으로 가득 찬

그 창고

문을 밀치면

큰 바다가 세상을 뒤덮는  

* 봄 내장사

거무죽죽한 가지에 젖멍울 맺히더니
연분홍 봉오리 터져 하르르 하르르
벚꽃 날리는 봄날
내장사 절길 따라 걸어보아라
키 작은 현호색 곁에 더 키 작은
개별꽃 피어 별처럼 반짝 눈물 보인다
제비꽃 금창초 보랏빛 바람
사랑도 이쯤이면 청초를 넘어
산자고 흰색 저고리 첫사랑의 머뭇거림도
흐르는 개울가에 앉아 발을 담근다

* 탁족 설법  

풍월 읊지 않는다 

 

퉁소 불지 않는다 

개울에 주저앉아 두 발만 씻는다 

굳은 살 옹이를 키운 

저 산에 큰절 올린다 

발바닥 문지르면 

거친 삶이 잡힌다 

뚜벅뚜벅 걸었던 상처가 물살 가른다 

무공해 송사리 떼가 

몰려와 듣는 설법

 

* 잡기(雜器)  

사발이 되려거든 막사발쯤 되어라 

청자도 백자도 아닌 이도다완(井戶茶碗) 막사발 

일본국 국보로 앉아 고려 숨결 증언하는 

백성의 밥그릇이었다가 

막걸리 사발이었다가 

삐뚤삐뚤 생김새 

거칠고도 투박하다 

용처가 저잣거리라 잡기(雜器)라고 했던가 

무사함이 귀인(貴人)이요, 단지 조작하지 마라* 

임제록(臨濟錄)을 바친 그윽한 속뜻 있어 

본색이 천것 아니라 백성의 밥이었거늘  

*임제록(臨濟錄)의  한 구절을 일본인 무네요시(柳宗悅)가 이도다완에 바쳤다 함 

 

* 시 한 줄  

집 한 채 짓고 살기

한평생 걸린다지만

마음에 시 한 줄 긋고 사는 일 얼마나 쓸쓸한가

각박한 세상살이에

시 한 줄이라니 

     

* 산국 
산길 오르다 만난 산국
바위틈에 홀로 피었다
벌 나비 찾지 않아도
고요, 너무 찬란해라
그 순간
아찔한 벼랑!
내 몸이 날개를 달다

 

* 용문사 은행나무

눈발 치는 이른 아침 겨울 용문산 가 보았다

천 년을 넘게 살아 거무칙칙한 은행나무

벗을 것, 다 벗어 던지고 바람 앞에 알몸

그렇지만 껍질 단단해 계곡에 박힌 돌멩이 같고

그 속에 박힌 옹이 어머니 젖가슴 같으니

때 되면 잎을 토해내 천 년을 더 살겠다

  

* 겨울에서 봄으로
겨울에서 봄으로 오는 길에서 사랑을 듣는다
결빙의 맑고 단단했던 사연들이
소리내는 물소리로 출렁인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잎들이 살아나고
아픈 이별까지 말해버릴 것 같다

 

* 떨고 있는 그리움  

여름은 셀 수 없이 

많은 

햇살 묶음 

 

가을은 한 사람의 

마음이 

마른 남자 

 

겨울은 

문 밖에 서서 

떨고 있는 

그리움

 

* 홍어

술 취한 친구의 한잔을 위하여

잘 삭은 홍어 되어 몸속으로 빨려든다면

어두운 살의 바다에 독한 냄새로 남으리

 

해일을 만나면 해일로 뒤집히고

알몸으로 만나면 알몸으로 섞이어

다시 환생치 못할 썩어 푹 썩어 있을 *

 

* 내 안의 당신

강을 건넜으면 나룻배를 버려야 하듯

당신을 만났으니 나를 버려야 했습니다

내 안에 자리한 당신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를 웃긴 꽃 - 윤희상   (0) 2009.08.31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0) 2009.08.28
[스크랩] 9월이 오면  (0) 2009.08.26
기다리는 마음 - 김민부  (0) 2009.08.25
빈집의 약속 - 문태준  (0) 2009.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