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꽃잎 인연 - 도종환

효림♡ 2009. 9. 22. 08:04

* 꽃잎 인연 - 도종환   

몸끝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저녁하늘과 만나고 간 기러기 수만큼이었을까
앞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만큼이었을까
가지 끝에 모여와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도
때가 되면 비 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살아 있는 동안은 바람 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 꽃잎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다

피었다 저 혼자 지는
오늘 흙에 누운
저 꽃잎 때문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시작도 아지 못할 곳에서 와서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의 저 외로운 나부낌

아득하고
아득하여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 젖은꽃잎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대신 비가 밤새 왔다
이 산 속에서 자랑하며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산벚나무가 환하게 꽃을 피운 연분홍 꽃그늘과
꽃 사이 사이를 빈틈 하나 없이 파랗게 채운
한낮의 하늘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젖은 꽃들은 진종일 소리
없이 지고
나무는 천천히 평범한 초록 속으로
돌아가는 걸 보며
오후 내내 도라지
밭을 매었다
밭을 점점이 덮은 꽃잎 흙에 묻히고
꽃 향기
도 함께 묻혔다
그댄 지금 어느 산을 넘는지 물어볼 수도 없어
세상은 흐리고 다시 적막하였다 *

 

* 돌아가는 꽃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 꽃다지
바람 한 줄기에도 살이 떨리는
이 하늘 아래 오직 나 혼자뿐이라고
내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처음 돋는 풀 한 포기보다 소중히 여겨지지 않고
민들레만큼도 화려하지 못하여
나는 흙바람 속에 조용히
내 몸을 접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안 뒤부터는
지나가는 당신의 그림자에
몸을 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고
건넛산 언덕에 살구꽃들이
당신을 향해 피는 것까지도 즐거워했습니다

내 마음은 이제 열을 지어
보아주지 않는 당신 가까이 왔습니다
당신이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로 흘러오리라 믿으며
다만 내가 당신의 무엇이 될까만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 이름이 없는 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너무도 가까이 계심을 고마워하는
당신으로 인해 피어 있는 꽃입니다 *

* 도종환시집[내가 사랑하는 당신은]-실천문학사

 

* 세월  

여름 오면 겨울 잊고 가을 오면 여름 잊듯 그렇게 살라 한다

정녕 이토록 잊을 수 없는데

씨앗 들면 꽃 지던 일 생각지 아니하듯 살면서 조금씩 잊는 것이라 한다

여름 오면 기다리던 꽃 꼭 다시 핀다는 믿음을 구름은 자꾸 손 내저으며 그만두라 한다

산다는 것은 조금씩 잊는 것이라 한다

하루 한낮 개울가 돌처럼 부대끼다 돌아오는 길 흔들리는 망초꽃 내 앞을 막아서며

잊었다 흔들리다 그렇게 살라 한다

흔들리다 잊었다 그렇게 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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