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억새 - 도종환

효림♡ 2009. 10. 5. 08:02

* 억새 - 도종환

 

저녁호수의 물빛이 억새풀빛인걸 보니
가을도 깊었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어머니,
억새풀밖에 마음 둘 데가 없습니다 
 
억새들도 이젠 그런 내 맘을 아는지
잔잔한 가을햇살을 따서
하나씩 들판에 뿌리며 내 뒤를 따라오거나
고갯마루에 먼저 와 여린 손을 흔듭니다 
 
저도 가벼운 몸 하나로 서서 함께 흔들리는
이런 저녁이면 어머니 당신 생각이 간절합니다 
 
억새풀처럼 평생을 잔잔한 몸짓으로 사신
어머니, 올 가을 이 고개를 넘으면 이제 저는
많은 것을 내려놓고 저무는 길을 향해
걸어 내려가려 합니다 
 
세상의 불빛과는 조금
거리를 둔 곳으로 가고자 합니다 
 
가진 것이 많지 않고 힘이 넘치는
자리에 앉아 본 적이 없는지라
어머니를 크게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였지만
제가 가슴 아파 하는 것은
어머니의 평범한 소망을
채워드리지 못한 점입니다 
 
험한 일 겪지 않고 마음 편하고 화목하게만
살아달라는 소망
아프지 말고 아이들 잘 키우고 남에게 애먼 소리
듣지 말고 살면 된다는 소박한 바람
그중 어느 하나도 들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험한 길을 택해 걸었기 때문에
내가 밟은 벼룻길 자갈돌이
어머니 가슴으로 떨어지는 소리만
수없이 들어야 했습니다 
 
내가 드린 것은 어머니를 벌판 끝에 세워놓고
억새같이 떨게 만든 세월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점점 사위어가는데
다시 가을이 깊어지고
바람은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져
우리가 넘어야 할 산 너머엔 벌써
겨울 그림자 서성댑니다 
 
오늘은 서쪽 하늘도
억새풀밭을 이루어 하늘은
억새구름으로 가득합니다 
 
하늘로 옮겨간 억새밭 사잇길로 어머니가
천천히 천천히 걸어가는 게 보입니다 
 
고갯마루에 앉아 오래도록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하늘에서도 억새풀이 바람에 날려 흩어집니다 
 
반짝이며, 저무는 가을햇살을 묻힌 채
잠깐씩 반짝이며
억새풀, 억새풀잎들이, *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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