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효림♡ 2009. 9. 23. 08:22

* 길 - 도종환

우리 가는 길에 화려한 꽃은 없었다

자운영 달개비 쑥부쟁이 그런 것들이

허리를 기대고 피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빛나는 광택도

내세울 만한 열매도 많지 않았지만

허황된 꿈에 젖지 않고

팍팍한 돌길을 천천히 걸어

네게 이르렀다

 

살면서 한 번도 크고 억센 발톱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귀뚜라미 소리 솔바람 소리

돌들과 부대끼며 왁자하게 떠드는 여울물 소리

그런 소리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 형제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음성도

세상을 호령할 명령문 한 줄도 가져보지 못했지만

가식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며

네게 이르렀다

 

낮은 곳에는 낮은 곳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있다

네 옆에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빈자리가 있다 *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 굽이 돌아가는 길 - 박노해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끓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요
돌아서지 마십시요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길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길입니다 * 
 

 

* 구부러진 길 - 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

 

*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 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 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 도종환시집[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랜덤하우스

 

*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피천득 역
 
* 길 -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 길 - 김추인

문을 나서면 문득
지도보다 먼저
길이 내 곁으로 다가서며
너 어디 갈래? 묻는다
못 들은 척 호주머니나 뒤적뒤적 딴청이면
그래 그래 그래
길이 그냥 길을 내준다
슬픈 날은 슬픔 쪽으로
쓸쓸한 날은 아직 길도 안 난 산기슭
아직 읽어내지 못한 내 이승의 끄트머릴
힐끗 보여주기도 하면서
억새바람 뒤로 희끄무레 돌아도 가면서
그래 그래 그래
끄득이며 길을 내준다
수신된 메세지 하나 없이
억수 쏟아지고 사무치는 날
문 밖에 서면
너 어디 갈래? 묻지도 않고
젖은 골목길이 추적추적 따라온다
구부정한 그의 어깨도 흐림이다

 

* 물길 - 정호승
길이 없을 때 물길을 따라간다
길을 찾다가 길을 잃고 말았을 때
터벅터벅 물길을 따라 걷다가
느릿느릿 산굽이를 따라 돌다가
해가 지면 어떠랴
길은 물을 만들지 못하나 물은 길을 만든다
강가의 돌멩이 속에도 물이 흐른다
작은 저녁별 속에도 푸른 물길은 굽이쳐
보라
사람들이 길을 다 버리고 물길을 따라간다
결코 가고 싶지 않았던
기어이 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슬픈 인간의 길을 다 버리고
물의 길을 따라가는
어린 물고기를 따라간다
 

* 정호승시집[포옹]-창비 

 

* 물길 - 이정하

물이 흘러가는 것에도 길이 있고

마음이 흘러가는 것에도 길이 있네

당신이 그리워 당신에게로 흘러가는

물길 같은 내 마음이여 

 

조용히 고여 당신을 비추기도 하고

때로는 출렁이다 당신을 조각내기도 한다

물이 흘러가는 것에도 길이 있고   

마음이 흘러가는 것에도 길이 있네

호수 같은 당신께로 날마다 자맥질하는

바다 같은 당신께로 온전히 주고야 마는

물길 같은 내 마음이여

 

길 - 이정하  

길에서 벗어나야
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듯
그대에게서 벗어나

그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네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다시 가지 않을 수 없었네
가도 가도 막막한 그 길에서
내 영혼은 다 부르텄다
 

* 이정하시집[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푸른숲

 

* 새로운 길 -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길 -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