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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각질 - 이병률

효림♡ 2009. 11. 16. 08:42

* 별의 각질 - 이병률   

  애초 내가 맡은 일은 벽에 그려진 그림의 원본을 추적하여 도화지에 옮겨 그리는 일이었다 부러진 이 가지 끝에

잎이 달렸을까 이 기와 끝에 매달린 것이 하늘이었을까 하루 이틀 상상하는 일을 마치고 처음 한 일은 붓으로 벽을

터는 일이었다 벽에다 말을 걸듯 천천히

  도저히 겹치지 않는 다른 그림이 나왔다 누군가 흰 칠을 해 그림을 지우고 다시 그린 것이 아닌가 하여

벽 한 귀퉁이를 분할한 다음 붓으로 다시 열흘을 털었다

  연못이 그려져 흐르고 있었다 다시 다른 구석을 닷새를 터니 악기를 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성지기가, 죽은 물고기가 올려진 천칭의 한쪽 모습도 보였다

  흰 칠을 하고 바람이 지나면 그림을 그리고 지워지면 다시 흰 칠을 하여 그림을 올리고

  다시 흰 칠을 하고 그림을 그려 흰 칠과 그림이 누대를 교차하는 동안 강이 불어나고 피가 튀고

폭설이 내려 수천의 별들이 번지고 내밀한 것처럼 밀리고 씻기고 쓸려 말라갔던 벽

  벽을 찔러 조심스럽게 들어내어 박물관으로 옮기면서 육백여 년 동안 그려진 그림이 수십 겹이라는 사실에

미어지는 걸 받치느라 나는 가매지고 무거워진다 책 냄새를 맡는다 살 냄새였던가 *

* 이병률시집[바람의 사생활]-창비

 

* 사랑의 역사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힌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혔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 이병률시집[바람의 사생활]-창비  

 

 * 백 년 
백 년을 만날게요
십 년은 내가 다 줄게요
이십 년은 오로지 가늠할게요
삼십 년은 당신하고 다닐래요
사십 년은 당신을 위해 하늘을 살게요
오십 년은 그 하늘에 씨를 뿌릴게요
육십 년은 눈 녹여 술을 담글게요
칠십 년은 당신 이마에 자주 손을 올릴게요
팔십 년은 당신하고 눈이 멀게요
구십 년엔 나도 조금 아플게요
백 년 지나고 백 년을 한 번이라 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을 보낼게요 *
* 이병률시집[눈사람 여관]-문지
            

* 시인들  

1. 나이 먹어서도 사람을 친근하게 못 맞아주더니
못된 놈처럼 자기만 아느라 독기로 밀쳐만 내더니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이 앞에선
마음이 열리고 바다가 보인다

술 한 잔 오가며
- 시인들이 원래 그렇죠, 뭐
낯선 이의 말 같다 싶은 말에
편 하나 끌어들인 기분 되어
진탕 마시고 마시다가 바다 앞에 선다

- 우리 잘하고 있는 거지?
처음 본 사인데 말까지 놓으면서
길에 핀 꽃대를 걷어차면서도 히히덕거리는
시인들의 저녁식사

 

유난히 쓸쓸해져 걸어 돌아오면 빈집 가득한 바람
누군가 왔다 갔나 킁킁거리면
늦은 밤 택시 타면서 밤길 잘 가라고 손 흔들던 시인
언제 들렀다 간 건지 바다 소리 들리고
무릎까지 들어온 갈대밭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2.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살면서 시인에게만 들었던 말
나도 따라 시인에게만 묻고 싶은 말
부모도 형제도 아닌 시인에게만 묻고
한사코 답 듣고픈 말

어찌할 것도 아닌데
지갑이 두둑해서도 아닌데
그냥 물어서 괜찮아지고 속이 아무는 말

옛 애인을 만나러 가다 말고
시 쓰는 이의 전화를 받고
그 길로 달려가서는 대뜸 묻는 말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 이병률시집[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

 

*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눈은 내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했던 시절 위로 내리는지 모른다

어느 겨울밤처럼 눈도 막막했는지 모른다

어디엔가 눈을 받아두기 위해 바닥을 까부수거나 내 몸 끝 어
딘가를 오므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피를 돌게 하는 것은 오로지 흰 풍경뿐이어서 그토록 창가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애써 뒷모습을 보이느라 사랑이 희기만 한 눈들, 참을 수 없이
막막한 것들이 잔인해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비명으로 세상을 저리 밀어버리는 것도 모르는 저 눈발

손가락을 끊어서 끊어서 으스러뜨려서 내가 알거나 본 모든
배후를 비비고 또 비벼서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이 되겠다는
듯 쌓이는 저 눈 풍경 고백 같다, 고백 같다 *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창비


* 무늬들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밀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며

그 아름다움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 몸을 향해 깊숙이 꽂은 긴 칼들

밀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

* 이병률시집[바람의 사생활]-창비

 

* 마음의 내과  

이 말이 그 말로 들릴 때 있지요 그 말도 이 말로 들리지요 그게 마음이지요 왜 아니겠어요 몸피는 하나인데 결이 여럿인 것처럼 이 사람을 귀신이라 믿어 세월을 이겨야 할 때도 있는 거지요 사람 참 마음대로지요 사람 맘 참 쉽지요 궤짝 속 없어지지 않는 비린내여서 가늠이 불가하지요 두 개의 달걀을 섞어놓고 섞어놓고 이게 내 맘이요 저것이 내 맘이요 두 세계가 구르며 다투는 형국이지요 길이가 맞지 않는 두 개의 자(杍)이기도, 새벽 두 시와 네 시 사이이기도 하지요 써먹을 데 없어 심연에도 못 데리고 가지요 가두고 단속해봤자 팽팽히 와글대는 흉부의 소란들이어서 마음은 그 무엇하고도 무촌(無寸)이지요 *

* 이병률시집[찬란]-문학과지성사

 

* 새날  

가끔은 생각이 나서

가끔 그 말이 듣고도 싶다

 

어려서 아프거나

어려서 담장 바깥의 일들로 데이기라도 한 날이면

들었던 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어머니이거나 아버지이거나 누이들이기도 했다

누운 채로 생각이 스며 자꾸 허리가 휜다는 사실을 들킨 밤에도

얼른 자, 얼른 자

 

그 바람에 더 잠 못 이루는 밤에도

좁은 별들이 내 눈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얼른 자, 얼른 자

 

그 밤, 가끔은 호수가 사라지기도 하였다

터져 펄럭이던 살들을 꿰맨 것인지

금이 갈 것처럼 팽팽한 하늘이기도 하였다

 

섬광이거나 무릇 근심이거나

떨어지면 받칠 접시를 옆에 두고

지금은 헛되이 눕기도 한다

새 한 마리처럼 새 한 마리처럼 이런 환청이 내려 앉기도 한다

 

자고 일어나면 개벽을 할 거야

 

개벽한다는 말이 혀처럼 귀를 핥으니

더 잠들 수 없는 밤

조금 울기 위해 잠시만 전깃불을 끄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