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백련사 동백꽃 - 송수권

효림♡ 2010. 1. 25. 08:10

* 백련사 동백꽃 - 송수권  

동백의 눈 푸른 눈을 아시는지요

동백의 연푸른 열매를 보신 적이 있나요

그 민대가리 동자승의 푸르슴한 정수리같은.....

그러고 보니 꽃다지의 꽃이 진 다음

이 동백숲길을 걸어보신 이라면

아기 동자승이 떼로 몰려 낭낭한 경(經) 읽는 소리

그 목탁 치는 소리까지도 들었겠군요

마음의 경(經) 한 구절로 당신도 어느새

큰 절 한 채를 짓고 있었음을 알았겠군요


그렇다면 불화로를 뒤집어쓰고 숯이 된

등신불(等身佛) 이야기도 들어 보셨나요

육보시 중에서도 그 살보시가 으뜸이라는데

등(燈)을 밝힌다면, 보시 중에서도 그 꽃보시가 으뜸인

오늘 이 동백숲을 보고서야 문득 깨달았겠군요!

 

한 세월 앞서

초당 선비가 갔던 길

뒷숲을 질러 백련사 법당까지 그 소롯길 걸어보셨나요

생꽃으로 뚝뚝 모가지 채 지천으로 깔린 꽃송아리들

함부로 밟을 수 없었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조심히 접어 목민심서 책갈피에 꽂았더니

누구의 울음인지 한 획 한 글자마다 낭자한 선혈

애절양 애절양으로 우는

동박새 울음이 유난히 슬픈 봄날이었지요


동안거(冬安居)도 끝나고 구강포 겨울 바람이 설치면

어느 큰 손이 부싯돌을 긋는지

팍팍 날리는 불티 몇 점도 보셨나요

그 불길 동백숲에 옮아 붙어 아련한 모닥불로 번질 때

그 불기운으로 저 정수사 앞 뜰 흙가마 속

청자수병(靑瓷水餠)이 솟고, 그 수병 속 물길 휘둘러

강진만에 첫 번째 우리들의 봄이 오고 있었음을 *

 

* 솔바람 태교 
산벚꽃잎 죄다 져내려 골짝 물 따라가고
돌배나무 흰 꽃잎이 산을 휘덮은 마을
이때쯤은 아무도 모르는 그 마을에
은은한 솔바람이 뜨기 시작한다

당찬 60령 고개를 휘어넘어
뱀사골, 우리는 늦깍이 아이 하나를 심어 놓고
솔바람 태교를 하러 가는 길이다

누가 심었는지 애솔 하나 자라
마을 지킴이로 천년송이 되고
서리서리 용비늘 뒤집어쓴 채 꿈틀거리면
온 골짜기 청비늘 가르는 솔바람 소리

겹겹 에워싼 저 능선들의 이마가 서느랍다

 

초밤 별이 서느랍고

밤중에 뜬 유정한 달이 서느랍다

소짝새 울음이 한바탕 자지러지니

뱃속에 든 아이의 배냇짓 잠도 서느랍다

 

아내는 항만한 배를 내밀고

천년송 아래 섰다

 

화공이여, 눈물나는 우리 화공이여

월하미인도를 그리려거든

이쯤은 그려라 *

 

* 여자 
이런 여자라면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잘하는 일 하나 없는 계산도 할 줄 모르는 여자
허나, 세상을 보고 세상에 보태는 마음은
누구보다 넉넉한 여자
어디선가 숨어 내 시집 속의 책갈피를 모조리 베끼고
찔레꽃 천지인 봄 숲과 미치도록 단풍 드는
가을과 내 시를 좋아한다고
내가 모르는 세상 밖에서 떠들고 다니는 여자
그러면서도 부끄러워 자기 시집 하나 보내지 못한 여자
어느 날 이 세상 큰 슬픔이 찾아와 내가 필요하다면
대책없이 떠날 여자, 여자라고 말하며
'여자'란 작품 속에만 숨어 있는 여자
이르쿠츠크와 타슈켄트를 그리워하는
정말, 그 거리 모퉁이를 걸어가며 햄버거를 씹는
전신주에 걸린 봄 구름을 멍청히 쳐다보고 서 있는
이런 여자라면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팔십 리 해안 절벽 변산 진달래가

산벼랑마다 드러눕는 봄날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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