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무꽃 피다 - 마경덕

효림♡ 2010. 2. 8. 08:38
* 무꽃 피다 - 마경덕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후다닥 무언가 뛰쳐나간다. 가슴을 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꽃이다. 까만 봉지 속이 환하다. 비닐봉지에 담긴 묵은 무 한 개 꽃자루를 달고 있다. 베란다 구석에 뒹굴던 새득새득한 무. 구부정 처진 꽃대에 연보랏빛 꽃잎 달렸다. 참말 독하다.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꽃을 피웠다. 손에 얹힌 무, 몸집보다 가볍다. 척, 제 무게를 놔버리지 못하고 주저주저 망설인다. 봄이 말라붙은 무꼬랑지 쥐고 흔들어댄 모양이다. 창을 넘어와 봉다리를 풀고 무를 부추긴 모양이다.

눈을 뜨다 만 무꽃. 여기가 어디라고 덜컥, 꽃이 되었던가. 어미 살을 파먹고 꽃이 된 무꽃. 쪼그라진 젖을 물고 있는 무꽃.
* 마경덕시집[신발論]-문학의전당

 

* 신발론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

 

* 토마토  

마당귀에 심은 토마토 한 그루

눈만 마주쳐도 덜컥 애가 선다

간짓대 같은 몸뚱이

쇠불알만한 새끼를 치렁치렁 달고

다시 입덧을 하는 토마토

누릇누릇 머리가 쇠고

허리가 휘었다

차마 놓을 수 없는 것들

버리지 못할 것들

안고 업고

작대기 하나로 버티는 토마토

 

또 만삭이다

저 무지렁이 촌부(村婦) *

 

거꾸로 福  
동네 자장면 집에 福자가 거꾸로 서 있다. 오가며 만나는 뒤집힌 복, 물구나무로 바라보면

제 얼굴을 보여주는 복, 왠지 거북하다. 뒤집힌 붉은 글씨가 집에까지 따라온다
 
문 앞에 떨어진 복 한 장, 福을 주워 바로 들고 들어가니 자장면을 말던 주인이 기겁을 한다

바로 선 복은 들어오자마자 바로 나가는 겨, 뒤집혀야 들어온 복이 처박혀 복이 쌓이는 겨

턱살이 넘치는 주인은 빨리 복을 뒤집으라고 야단이다
 
뒤집히고 거꾸로 처박혀야 복이 온다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속 좀 그만 뒤집으라고 했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개골창에 그만

처박히라고 했다. 뒤집고 처박혔지만 우리 집엔 한 번도 복이 오지 않았다. 금주를 맹세한 남자들

손바닥 뒤집듯 약속을 어긴 어르신들이 모두 복을 똑 바로 붙였기 때문이다

 

* 계란 프라이

스스로 껍질을 깨뜨리면 병아리고 누군가 껍질을 깨주면 프라이야,
남자의 말에 나는 삐약삐약 웃었다. 나는 철딱서니 없는 병아리였다.
그 햇병아리를 녀석이 걷어찼다. 그때 걷어차인 자리가 아파 가끔 잠을 설친다. 자다 깨어 날계란으로 멍든 자리를 문지른다.

분명 녀석의 발길질에 내 껍질이 깨졌다. 그러니까, 나는 프라이가 된 셈이다.

팬에 놓인 것처럼 심장이 뜨거웠고 소금 뿌린 자리가 쓰라렸다.
그와 헤어진 후 또 한 개의 흉터를 얻었다. 자라목에 두꺼운 안경을 낀 말대가리 녀석, 맞선에서 몇 번이나 차였는지 상처투성이였다. 그래 어디를 걷어 차줄까, 잠깐 방심하는 사이, 눈치 빠른 녀석이 먼저 박차고 일어섰다. 얼떨결에 나는 쩍 금이 갔다.
헛발질에도 쉽게 깨지던, 계란으로 바위 치던 시절, 사랑은 내게 넘치거나 못 미쳤다. 번번이 달궈진 팬에 왈칵 쏟아졌다.

나는 한 번도 껍질을 깨지 못했다. *

 

* 봄날                                          

하동 고하리 장날, 줄줄이 이고 지고 버스에 오릅니다. 때는 봄, 온 천지가 후끈 달아올라 노인의 마른 몸에도 물이 고일 것 같은 날, 장 보고 가는 고무다라 보따리 포대자루 초만원입니다. 매부리코 노총각 윗말 어린 처녀 등에 찰싹 붙어 코를 씰룩, 눈을

내리 뜬 처녀 귓불이 붉네요. 훌쩍 마흔 넘긴 무지렁이 총각 절구통에 치마만 둘러놔도 거시길 디밀 겁니다. 환장할 봄이거든요. 재첩장사 과부 아지매, 떨이를 못했는지 어깨가 많이 기울었습니다.

 

최씨네 구멍가게 돌아 커브 길에 닿자 걸쭉한 아낙의 목소리, “에구구! 젓통 터진다.” 소갈머리 없는 밴댕이 남편에게 먹여보라는 젓갈장사에게 홀려 콤콤한 젓갈 한 봉지 산 게 그만 터지고 말았습니다. “젖통이요, 젓통이요?” 능글맞은 남정네의 물음에

왈칵 웃음이 쏟아집니다. 산수유가 노랗게 실눈 뜨는 봄, 발을 밟혀도, 허허허, 호호호. 봄은 넉살좋게 굴러갑니다.

 

삼거리 욕쟁이 할매 보따리 챙겨들고 일어서는데. 버스문 까지는 첩첩산중, 입심은 여전해 오살헐 놈, 육실헐 놈 출구에 닿기 전 이미 몇 놈은 죽어 넘어졌지요. 성미 급한 어르신 얼른 비키라고 호통이신데. 쉽게 길이 나지 않습니다. 밀고 당기며 간신히 내렸는데 아뿔사! 아랫도리 허전합니다. 노상에서 고쟁이 하나 달랑 걸친 할매, “이놈들아, 치마 내놔라” 일갈에 끈달이 홑치마를 찾느라 또 한번 버스가 우당탕, 옆구리를 비틉니다. 누군가 비린내 묻은 치마를 휙 창 밖으로 던지고 웃음 한 사발 엎질러집니다. 봄은 또 그렇게 스리슬쩍 가파른 고개를 넘어갑니다.  

* [시로 여는 세상]-200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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