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새였으면 좋겠어 - 이태수

효림♡ 2010. 6. 11. 08:28

* 새였으면 좋겠어 - 이태수  

새였으면 좋겠어. 지금의 내가 아니라

전생의 내가 아니라, 길짐승이 아니라

옥빛 하늘 아득히 날개를 퍼덕이는

마음 가는 델 날아오르고 내리는

 

새였으면 좋겠어. 때가 되면 잎을 내밀고

꽃을 터뜨리지만, 제자리에만 서 있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 아니라, 걸을 수는 있지만

날지 못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몸에도

마음에도 퍼덕이는 날개를 달고 있는

 

새였으면 좋겠어. 그런 한 마리 새가 되어

이쪽도 없고 저쪽도 없는, 동도 서도 없이

저쪽이 이쪽이 되고, 북쪽이 남쪽이 되는

그런 세상을 한없이 드나들고 오르내리는

 

나는 하염없이 꿈구는 풀, 아니면 나무

아니면, 길짐승이나 전생의 나, 아니면

지금의 나도 아니라, 새였으면 좋겠어

언제까지나 아득한 허공에 날개를 퍼덕이는 *

 

* 다시 새해 아침에 
새해에는 새로이 눈뜨게 하소서.
낡고 오랜 집에 그대로 살더라도
다시 살게 하시고, 새 꿈을 이루게 하소서.
잠을 터는 산 발치의 한 그루 소나무,
벗을 것 다 벗은 미루나무 빈 가지에도
새로운 피가 돌게 하시고
얼음장 밑 물고기들, 빈 들판 위를 비상하는
새들의 기다리는 눈빛에도
아름답고 새로운 꿈이 반짝이게 하소서.

가위눌리고 구겨진, 뒤틀리고 이지러진
우리, 마음의 어둠과 그늘들이
막 태어나 퍼덕이는 햇살에 말끔히 씻겨지고
오로지 생명과 사랑의 길로 나아가는
지혜와 너그러움이 돋아나게 하소서.
낡은 책장을 덮듯, 컴퓨터의 칩을 갈아끼우듯
어제의 허물들은 죄다 지워버리시고
이 아침부터는 진정 다른 세상,
둥글고 따스하고 넉넉한 나라이게 하소서.

주먹 풀고 무겁게 자기 가슴이나 치는,
눈먼 바람 앞에서 속으로만 고개를 젓는,
그런 안개 마을의 어두운 사람들을 위하여,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어린 양떼의
이마 넓고 푸른 목자를 위하여,
흔들리지 않는 말들과 우리의 새 문법을 위하여,
이 아침에는 새로운 은총이 온누리 가득
내리게 하소서. 새해 새 아침에는
우리 모두 거듭 태어나게 하소서.

 

* 새에게 

새야 너는 좋겠네. 길 없는 길이 많아서

새 길을 닦거나 포장을 하지 않아도

가다가 서다가 하지 않아도 되니, 정말 좋겠네

높이 날아오를 때만 잠시 하늘을 빌렸다가

되돌려주기만 하니까, 정말 좋겠네

길 위에서 자주자주 길을 잃고, 길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길이 너무나 많은 길 위에서

나는 철없이 꿈길을 가는 아이처럼

옥빛 하늘 멀리 날아오르는 네가 부럽네

길 없는 길이 너무 많은 네가 정말 부럽네 *

 

* 남산 돌부처 
경주 남산 돌부처는 눈이 없다
귀도 코도 입도 없다
천년 바람에 모든 껍데기 다 내주고 천년을 거슬러 되돌아가고 있다
안 보고 안 듣고 안 맡으려 하거나 더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천년의 알맹이 안으로 쟁여 가기 위해, 다시 천년의 새 길 보듬어 오기 위해
느릿느릿 돌로 되돌아가고 있다
돌 속의 둥근 길을 가고 있다

 

* 풍경(風磬) 
바람은 풍경을 흔들어 댑니다
풍경 소리는 하늘 아래 퍼져 나갑니다

그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나는
그 속마음의 그윽한 적막을 알 리 없습니다

바람은 끊임없이 나를 흔듭니다
흔들릴수록 자꾸만 어두워져 버립니다

어둡고 아플수록 풍경은
맑고 밝은 소리를 길어 나릅니다

비워도 비워 내도 채워지는 나는
아픔과 어둠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두워질수록 명징하게 울리는 풍경은
아마도 모든 걸 다 비워 내서 그런가 봅니다

 

* 이슬방울
풀잎에 맺혀 글썽이는 이슬방울
위에 뛰어내리는 햇살
위에 포개어지는 새소리, 위에
아득한 허공.

그 아래 구겨지는 구름 몇 조각
아래 몸을 비트는 소나무들
아래 무덤덤 앉아 있는 바위, 아래
자꾸만 작아지는 나.

허공에 떠도는 구름과
소나무 가지에 매달리는 새소리,
햇살들이 곤두박질하는 바위 위 풀잎에
내가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 *

* 이태수시집[이슬방울 또는 얼음꽃]-문학과 지성사

 

* 그대, 꽃잎 속의 -가곡을 위한 시

꽃이 피기까지는 오래 기다렸어도
꽃이 지는 데는 물거품 같네.
꽃잎 속의 그대 잠시 그리워하는 사이,
그 향기 더듬어 길을 나설 사이도 없이
나의 꽃은 너무나 아쉽게 지고 마네.
그대가 처음 내 마음에 피어날 때처럼
꽃잎이 머물던 자리 아직도 아릿하건만
꽃은 져도 안 잊혀지듯이 그대 가도
안 잊혀지네, 영영 잊혀지지 않네. *
* 이태수시집[이슬방울 또는 얼음꽃]-문학과 지성사

 

* 구름 한 채

구름 한 채 허공에 떠 있다

떠 있는 게 아니라 거기 단단히 붙들려 있다

한참 올려다봐도 그 자리에 그대로다

풀 것 다 풀어놓고 클 태()자로 드러누워

꿈속에 든 건지, 미동조차 없다

아무리 끌어당겨도 아득한

내 마음의 다락방이 유독 큰 저 집

눈을 감았다 떠보면

새들이 불현듯 까마득하게 날아올라

허공을 뚫고 있다

구름을 날카로운 부리로 마구 쪼아댄다

그분은 이 한낮에도 캄캄한 마음

다듬이로 두드려 구김살 펴주고

주름들을 다림질해준다

나도 모르는 허물들마저 하나씩 지우면서

그중 유별나게 깊이 파인 영혼의 골을 메운다

궁륭 같은 골에 날개를 달아준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구름 한 채 무참하게 이지러진다

며칠째 두문불출, 내가 구들장을 지고 있는

우리 집, 창 앞까지 낯익은 새들이 날아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들은 저희끼리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

*시로 여는 세상-2009년 가을호

 

* 회화나무 그늘
길을 달리다가, 어디로 가려하기보다 그저 길을 따라 자동차로 달리다가, 낯선 산자락 마을 어귀에 멈춰섰다. 그 순간, 내가 달려온 길들이 거꾸로 돌아가려 하자 늙은 회화나무 한 그루가 그 길을 붙들고 서서 내려다보고 있다.

한 백 년 정도는 그랬을까. 마을 초입의 회화나무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오가는 길들을 끌어안고 있었는지 모른다. 세월 따라 사람들은 이 마을을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했으며, 나처럼 뜬금없이 머뭇거리기도 했으련만, 두껍기 그지없는 회화나무 그늘.

그 그늘에 깃들어 바라보면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며 펄럭이는 바람의 옷자락. 갈 곳 잃은 마음은 그 위에 실릴 뿐, 눈앞이 자꾸만 흐리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는지, 이름 모를 새들은 뭐라고 채근하듯 지저귀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여태 먼 길을 떠돌았으나 내가 걷거나 달려운 길들이 길 밖으로 쓰러져 뒹군다. 다시 가야 할 길도 저 회화나무가 품고 있는지, 이내 놓아줄 건지. 하늘을 끌어당기며 허공 향해 묵묵부답 서 있는 그 그늘 아래 내 몸도 마음도 붙잡혀 있다. *

* 이태수시집[회화나무 그늘]-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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