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꽃 - 안도현

효림♡ 2010. 7. 27. 08:04

* 꽃 - 안도현  

바깥으로 뱉어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몸 속에 있기 때문에

꽃은, 핀다

솔직히 꽃나무는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게 괴로운 것이다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

이것은 터뜨리지 않으면 곪아 썩는 못난 상처를

바로 너에게 보내는 일이다

꽃이 허공으로 꽃대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다 꽃대는

꽃을 피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 몸을 세차게 흔든다

사랑이여, 나는 왜 이렇게 아프지도 않는 것이냐

 

몸 속의 아픔이 다 말라버리고 나면

내 그리움도 향기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살아남으려고 밤새 발버둥을 치다가

입 안에 가득 고인 피

뱉을 수도 없고 뱉지 않을 수도 없을 때

꽃은, 핀다 *

 

* 꽃

누가 나에게 꽃이 되지 않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선뜻 봉숭아꽃 되겠다 말하겠다


꽃이 되려면 그러나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겠지

꽃봉오리가 맺힐 때까지

처음에는 이파리부터 하나씩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밀어 보는 거야


햇빛이 좋으면 햇빛을 끌어당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흔들어보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도 오겠지
그 밤에는 세상하고 꼭 어깨를 걸어
야 해

사랑은

가슴이 시리도록 뜨거운 것이라고

내가 나에게 자꾸 말해주는 거야


그 어느 아침에 누군가

아, 봉숭아꽃 피었네 하고 기뻐하면

그이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내 몸뚱어리 짓이겨 불러줄 것이다

 

* 찔레꽃

봄비가 초록의 허리를 몰래 만지려다가

그만 찔레 가시에 찔렸다

 

봄비는 하얗게 질렸다 찔레꽃이 피었다

 

자책, 자책하며 봄비는

무려 오백 리를 걸어 갔다 *

 

* 극진한 꽃밭  

봉숭아꽃은

마디마디 봉숭아의 귀걸이,

 

봉숭아 귓속으로 들어가는 말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일 먼저 알아들으려고 매달려 있다가

달량달량 먼저 소리를 만들어서는 귀속 내실로 들여보내고 말 것 같은,

마치 내 귀에 여름 내내 달려있는 당신의 말씀 같은,

 

귀걸이를 달고 봉숭아는

이 저녁 왜 화단에 서서 비를 맞을까

왜 빗소리를 받아 귓불에 차곡차곡 쟁여두려고 하는 것일까

 

서서 내리던 빗줄기는

왜 봉숭아 앞에 와서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일까

빗줄기는 왜 결절도 없이

귀걸이에 튀어오른 흙탕물을

빗방울의 혀로 자분자분 핥아내게 하는 것일까

 

이 미칠 것 같은 궁금증을 내려놓기 싫어

나는 저녁을 몸으로 받아들이네 

봉숭아와 나 사이에,

다만 희미해서 좋은 당신과 나 사이에,

저녁의 제일 어여쁜 새끼들인 어스름을 데려와 밥을 먹이네 *

 

* 개망초꽃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 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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