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황새 - 박형준

효림♡ 2010. 12. 13. 08:36

* 황새 - 박형준 
눈보라 치는 밤이었다

보퉁이를 손에 꼭 그러쥐고
서울역 광장 역 처마에 서서
노인 하나가 정신없이 길 건너 빌딩의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차(汽車)를 기다리는 것일까
자신의 침과 먼지로 번들번들 빛났을 누더기
오리발 갈퀴처럼 땅바닥을 비비며
눈보라 속에서 그 하얀 깃이 끌리는 것이
멸족한 새의 환영 같았다

눈보라에 앞뒤로 흔들리는 모습이
제 부리를 길 건너 빌딩의 유리창에 콕콕 가져다 대는 시늉처럼 보였다

이런 밤에 고향을 그리다가
불빛 속에 집을 지으려 길 건너쪽으로 날아갔던 것일까


보퉁이를 손에 꼭 그러쥔 노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다가
다시 눈보라 속에 지워진다
포도에 흩날리는 눈발이
새가 수면에 남긴 발자국처럼 바람에 사라진다
유리창에 가라앉은 수면에 끊임없이
끼룩대는 불빛들

겨울밤이 매섭다 * 

* 박형준시집[춤]-창비

 

* 사랑 

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 주고 싶다.
날개를 접고 호수 위에 떠 있는 오리떼.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저녁 해.

우리는 풀밭에 앉아있다.
산 너머로 뒤늦게 날아온 한 떼의 오리들이
붉게 물든 날개를 호수에 처박았다.
들풀보다 낮게 흔들리는 그녀의 맨발,
두 다리를 맞부딪히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기만 한.

해가 지는 속도보다 빨리
어둠이 깔리는 풀밭.
벗은 맨발을 하늘에 띄우고 흔들리는 흰 풀꽃들,
나는 가만히 어둠속에서 날개를 퍼득여
오리처럼 한번 날아보고 싶다.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
오래 전에
나는 그녀의 눈 속에
힘겹게 떠 있었으나. *

* 박형준시집[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창비

 

* 빈집  

개 한 마리 

감나무에 묶여

하늘 본다

까치밥 몇개가 남아 있다

새가 쪼아먹은 감은 신발

바람이 신어보고

달빛이 신어보고

소리없이 내려와

불빛 없는 집

등불

 

겨울밤을

감나무에 묶여

앞발로 땅을 파며 김칫독처럼

운다, 울어서

등을 말고 웅크리고 있는 개는

불씨

감나무 가지에 남은 몇개의 이파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새처럼 개의 눈에 아른거린다

 

주인이 놓고 간

신발들

빈집을 녹인다

긴 겨울밤

* 박형준시집[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창비

 

* 달의 우물 

보름달이 드는 밤엔 달 흔적이 선명해진다

달에는 우물이 있고

그 속에는 짐승이 까만 눈으로 어둠을 응시한다

가끔씩 더운 입김이 달 그늘에 서린다 * 

 

* 홍시

뒤뜰에서 홍시가 
철퍼덕철퍼덕 떨어지는 밤 
아버지 돌아가신 자리에 
아버지처럼 누워서 듣는다 
 
얇은 벽 너머 
줄 사람도 없는디 
왜 자꾸 떨어진데여 
힘없는 어머니 음성

  
아버지처럼

거그, 하고 불러본다

죽겄어 묻는 어머니 말에 
응 나 죽겄어

고개를 끄덕이던  
임종 가까운데

자식 오지 않고

뻣뻣한 사족 
이불 밖으로 나온 손

가슴에 얹어 주던 어머니


큰방에 누워

뒤뜰 홍시처럼 가슴에 
둥글게 주먹 말아 쥐고

마을 가로질러 가는

기차 소리 듣는다

 

* 봄비 
당신은 사는 것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내게는 그 바닥을 받쳐줄 사랑이 부족했다. 봄비가 내리는데, 당신과 닭백숙을 만들어먹던 겨울이 생각난다. 나를 위해 닭의 내장 안에 쌀을 넣고 꼬매던 모습. 나의 빈 자리 한땀한땀 깁는 당신의 서툰 바느질. 그 겨울 저녁 후후 불어먹던 실 달린 닭백숙.

 

* 별식(別食)

빗속에서 밀가루 떡 냄새가 난다.
창을 활짝 열어둔다.


어린 시절 머리맡에 놓여진
밀가루 떡 한 조각.
동구의 밭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점심 무렵 돌아와
막내를 위해 만들어주던 밀가루 떡.


누군가의 머리맡에
그런 시 한 편 슬몃 밀어놓은 날 있을까.
골목의 빗속에서
아무 맛도 없이 부풀어가는 *

* 정끝별의 밥시이야기[밥]-마음의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