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 살자고 하는 짓 - 하종오
밭고랑에서 삐끗해 금 간 다리뼈 겨우 붙으니
늙은 어머니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마당가로 가
참나무 아래서 도토리 주워 껍질 까다가
막내아들이 쉬라고 하면 내뱉었다
놔둬라이, 뼈에 숭숭 드나드는 바람 달래는 거여
장가 못 든 쉰줄 막내아들이
홀로 된 여든줄 어머니 모시고 사는데
막내아들이 검정콩 베어다 마당 한복판에 쌓아놓으면
늙은 어머니는 참나무 가지로 타닥타닥 두드려 털고
막내아들이 멀리 튄 콩 주워오면 소리질렀다
놔둬라이, 한구석에 묻혀서 명년까지 있고 싶은 거여
막내아들이 갈아입힌 속옷에 새물내 나서
늙은 어머니는 코 킁킁거리며 새물새물 웃다가
막내아들이 겉옷에 붙은 풀씨 뜯어내면 중얼거렸다
놔둬라이, 혼자 못 가는 곳에 같이 가자는 거 아니겠냐
늙은 어머니가 해거름에 집 안으로 들 적에
이웃집 수캐가 어슬렁어슬렁 대문 먼저 넘어서
암캐에게 올라타려고 낑낑거리는 꼴이 민망해서
막내아들이 콩줄기 거머쥐고 후려치면 말렸다
놔둬라이, 지들 딴엔 찬 밤 길어지니 옆구리 시린 게여
다들 지 살자고 하는 짓이여 다들 지 살자고 하는 짓이여 *
* 하종오시집[반대쪽 천국]-문학동네
* 해거리
원래 남의 밭에 있던 것을 슬쩍 해와서
화단에 심어놓은 뒤로 내 속셈 모르는 척
적작약이 다신 꽃을 피우지 않았답니다.
제까짓 놈 제까짓 놈 언제까지 영 꽃 안 피우는지
두고보자 벼른 지 몇 해 되는 사이에 그만
나는 눈길을 거두었고, 되는 일이 없었답니다.
날 사로잡아봐야 흰 꽃송이나 도둑당하지 싶어서
에잇 고얀 사람 에잇 고얀 사람 지 맘대로 하라는 건지
적작약이 잎사귀만 내어 보이고 일찌감치 시들었답니다.
서로 본체만체 하는 동안에 비로소 알았을까요.
오래 내 눈빛을 받아야 저도 꽃망울을 맺고
제 꽃봉오릴 오래 보여주면 나도 잘된다는 걸.
올해는 희디흰 꽃송이를 송이송이 벙글었답니다.
아니, 아니, 한해 더 넘기면 꽃을 피워서는 안될 일이
적작약에게 있었을 겁니다.
* 무언가 찾아올 적엔
서울 콘크리트집 마당에 서 있는 산초나무 캐어
시골 텃밭가에 옮겨 심고 돌아왔다
애초에 산초나무가 왜 날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밤이면 나란히 앉아 달 쳐다보며 지냈다
그 몇해 동안에 내 눈빛 가져갔었나,
그가 없으니 눈 침침하여 하늘이 흐려 보였다
한철 뒤 시골 텃밭에 가서 말라죽는 산초나무 보다가
무언가 찾아올 적에는 같이 살자고 찾아온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다시 캐어 서울 콘크리트집 마당에 옮겨 심었다
그날 밤 달 향하여 산초나무와 같이 앉았더니
홀연히 내 눈이 밝아져서 잎사귀에
달빛 빨아들여 빚는 향기도 보이는 것이었다 *
* 초봄이 오다
산수유 한 그루 캐어 집에 옮기려고
산에 가만가만 숨어들었다.
나무는 뿌리를 밑으로 밑으로 내려놓았겠지.
자그마한 산수유 찾아 삽날을 깊숙이 꽂았다.
이제 한 삽 뜨면 산에게서 내게로 올 게다.
겨울 내내 집안은 텅 비고 날 찾아오는 이 없었어.
이제 마당귀에 산수유 심어놓고
그 옆에서 꽃 피길 기다리면
이 산이라도 날 찾아오겠지.
삽자루에 힘을 주어도 떠지지 않아서
뿌리 언저리 손으로 파헤쳐보았다.
산수유는 뿌리를 옆으로 옆으로 벌려놓고 있었다.
나는 삽날 눕혀 뿌리 밑을 돌아가며
둥그렇게 뜬 뒤 밑동 잡고 들어올렸다.
한 그루 작은 산수유 실뿌리 뚜두두둑 뚜두두둑 끊기자
산에 있던 모든 산수유들 아픈지 파다닥파다닥
노란 꽃망울들 터뜨렸다.
* 시어머니가 며느리년에게 콩심는 법을 가르치다
외지 떠돌다가 돌아온 좀 모자란 아들놈이
꿰차고 온 좀 모자라는 며느리년을 앞세우고
시어미는 콩 담은 봉지 들고 호미 들고
저물녘에 밭으로 가고
입이 한 발 튀어나온 며느리년 보고
밥 먹으려면 일해야 한다고 핀잔주지는 않고
쭈그려 앉아 두렁을 타악타악 쪼고
두 눈 멀뚱멀뚱 딴전 피는 며느리년 보고
어둡기 전에 일 마쳐야 한다고 눈치주지는 않고
콩 세 알씩 집어 톡톡톡 넣어 묻고
시어미가 밭둑 한 바퀴 돌아오니
며느리년도 밭둑 한 바퀴 뒤따라 돌아와서는,
저 너른 밭을 놔두고 뭣 땜에 둑에 심는다요?
이 긴 하루에 뭣 땜에 저녁답에 심는다요?
며느리년이 어스름에 묻혀 군지렁거리고
가장자리부터 기름져야 한복판이 잘 돼지,
새들도 볼 건 다 보는데 보는 데서는 못 심지
시어미도 어스름에 묻혀 군지렁거리고
다 어두운 때 집에 돌아와 아들놈 코고는 소리 듣고
히죽 웃는 며느리년에게 콩 남은 봉지와 호미 쥐어주고
시어미가 먼저 들어가 방문 쾅 닫고 *
*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
* 하종오시집[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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