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효림♡ 2011. 4. 15. 08:26

*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며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

 

* 거미 

이른 아침

백담사 가는 길을 걸을 때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로 이어진 거미줄에

내가 평생 흘린 모든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거미 한 마리

내 눈물을 갉아먹으려고 황급히 다가오다가

아침햇살에 손을 모으고

고요히

기도하고 있었다 *

 

*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나는 나의 가장 가난했던

미소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목마른 저녁 거리에서

내가 늘 마시던 물은

내 눈물까지 데리고 땅속으로 사라지고

날마다 내 가슴속으로 눈부시게 날아오르던 새는

부러진 내 날개를 데리고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쓸쓸한 저녁 바닷가

수평선 머너로 사라지는 수평선과 함께

인간이 되고 싶었던 나의 모든 꿈조차

꿈속으로 사라져

 

캄캄한 서울

종로 피맛골 한 모퉁이

취객들의 밤의 발자국에 깊이 어린

별빛들만 사라지지 않고 홀연히

술에 취한다 *

 

* 정호승시집[밥값]-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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