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갱년기 - 황인숙

효림♡ 2012. 1. 20. 13:55

* 갱년기 - 황인숙 

이번 역은 6호선 열차로 갈아탈 수 있는

삼각지역입니다

삼각지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으로 열리는 출입문을 향해

우르르 몰려온다

다시는 오지 않을 열차라도 되는 듯

놓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달려온다

이런, 이런,

 

그들을 살짝 피해

나는 건들건들 걷는다

건들건들 걷는데,

6호선 승차장 가까이서

열차 들어오는 소리!

어느새 내가 달리고 있다

누구 못잖게 서둘러 달리고 있다

 

이런, 이런,

이런, 이런,

건들거리던 내 마음

이렇듯 초조하다니

 

놓쳐버리자, 저 열차!

 

* 생일파티 - 문정희 
싱싱한 고래 한 마리 내 허리에 살았네
그때 스무 살 나는 푸른 고래였지
서른 살 나는 첼로였다네
적당히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잘 길든 사내의 등어리를 긁듯이
그렇게 나를 긁으면 안개라고 할까
매캐한 담배 냄새 같은 첼로였다네
마흔 살 땐 장송곡을 틀었을 거야
검은 드레스에 검은 장미도 꽂았을 거야
서양 여자들처럼 언덕을 넘어갔지
이유는 모르겠어
장하고 조금 목이 메었어
쉰 살이 되면 나는 아무 것도 잡을 것이 없어
오히려 가볍겠지
사랑에 못 박히는 것조차
바람결에 맡기고
모든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 반은 없는
쉰 살의 생일파티는 어떻게 할까
기도는 공짜지만 제일 큰 이익을 가져온다 하니
청승맞게 꿇어앉아 기도나 할까 *

* 문정희시집[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

* 스무 살 - 곽재구 
길 가다
꽃 보고


꽃 보다
해 지고


내 나이
스무 살


세상이 너무
사랑스러워


뒹구는
돌 눈썹 하나에도
입맞춤하였다네. *

 

* 사십 세가 되어 새를 보다 - 함민복 
새가 앉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새도
흔들린다
새들에게
하늘로 날 꿈을 준
나무는
새들의 긴 다리다
새들은
나무의 그림자다 *

 

* 무서운 나이 - 이재무 
천둥 번개가 무서웠던 시절이 있다
큰 죄 짓지 않고도 장마철에는
내 몸에 번개 꽂혀올까봐
쇠붙이란 쇠붙이 멀찌감치 감추고
몸 웅크려 떨던 시절이 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새 한 아이의 아비가 된 나는
천둥 번개가 무섭지 않다
큰 죄 주렁주렁 달고 다녀도
쇠붙이 노상 몸에 달고 다녀도
그까짓 것 이제 두렵지 않다.
천둥 번개가 괜시리 두려웠던
행복한 시절이 내게 있었다 *

* 마흔 - 최승자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 참 우습다  - 최승자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