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떨어진 꽃 하나를 줍다 - 조창환
떨어진 꽃 하나를 주워 들여다본다
밟히지 않은 꽃잎 몇 개는 나긋나긋하다
꽃잎 하나를 따서 가만히 비벼보면
병아리 심장 같은 것이 팔딱팔딱 숨쉬는
소리 따뜻하고, 손가락 끄트머리가
아득하다 안개 속의 섬처럼, 혹은
호수에 잠긴 절 그림자처럼
떨어진 꽃 하나를 주워 들여다보는
아침 뜨락에 햇빛 가득하고
어디서 만년설 무너지는 소리
울린다 가을 잎들이
백지 같은 바람 속에서 마구 흔들리고
벌레들이 소스라친다 *
* 여백
감나무 가지 끝에 빨간 홍시 몇 알
푸른 하늘에서 마른번개를 맞고 있다
새들이 다닌 길은 금세 지워지고
눈부신 적멸(寂滅)만이 바다보다 깊다
저런 기다림은 옥양목 빛이다
칼 빛 오래 삭혀 눈물이 되고
고요 깊이 가라앉아 이슬이 될 때
묵언(黙言)으로 빚은 등불
꽃눈 틔운다
두 이레 강아지 눈 뜨듯
이 차갑고 명징한 여백 앞에서는
천사들도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다 *
* 천사의 노동
날은 밝고 창은 따뜻하고
벌레 소리 희미하게 울리는
이른 저녁
종일 흙더미를 밀어 올리던
어린 싹 하나가
허공에 무슨 글씨를 쓰며 놀고 있다
무거운 집 지고 가던 달팽이 한 마리
끈적한 침 묻혀놓은
아파트 안 길 돌아보며 놀고 있다
아스팔트 위로 목련 꽃잎 몇 개
어깨에 황사 조금 묻힌 채
툭툭 떨어지며 놀고 있다
낡은 흐리고 창은 어둡고
벌레 소리 뚝 끊어진
늦은 저녁
어린 천사가 어린 싹을 다시 밀어 올리고
어린 천사가 늙은 달팽이 등짐을 밀어주고
어린 천사가 짓밟힌 꽃잎에서 황사 먼지를 털어준다 *
* 등대
캄캄한 밤 회오리바람 속에서 깜빡거린다
저 불빛, 부러진 단검 하나 남은 검투사 같다
무슨 결박으로 동여매 있기에
제 안의 황야에 저리 고달프게 맞서는 것일까
등대는 외롭고 적막하고 단호하다
모든 찰나는 단호하므로 미래가 없고
미래가 없으므로 과거도 없다
모든 찰나는 영원한 현재이므로
마지막 순간까지 결연하게 깜빡거린다
저 불빛, 절벽 앞에서의 황홀이다
* 서러운 낮잠
설핏 잠들었던가 꿈속에서도
여우비 지나는 소리 들리고
먼 데 하늘에 놋대접 같은
반가운 얼굴 하나 스러질 듯 나타나고
봄꽃보다 애틋한 사랑이 다가와
손을 흔든다 머나먼 곳으로 길
떠나는 모양이다
꿈 속에서도 가슴 미어지는
젊은 날의 안타까움에 눈물 흘리다
서러운 낮잠 깨어 눈물 닦으니
엎드렸던 책상 위의 컴퓨터에선
이메일 편지 한 통 깜박거리며
바라다본다 흩어진 풀씨 같은
글자들이 흔들리며 옥잠화처럼 웃는다
무너진 봄이 화면에서 걸어나와
쓰라린 시간들을 깨워 일으킨다
* 여름밤
달을 품은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풀무치 울음소리 안개처럼 자욱하고
밝은 그늘 속에 낯익은 얼굴 하나
흰 새를 품에 안고 갈꽃처럼 흔들린다
기억이 닿지 않는 곳에서부터
습한 바람이 밀려왔다 가라앉고
자벌레 움츠리듯 오르가든 꽃잎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오래 일렁인다
여름밤, 달빛 흔드는 그늘
구석진 곳에서 홀로 부끄러울 때
우물 속의 빈터를 들여다보며
오래 삭힌 그리움을 가라앉힌다
* 나는 늙으려고
나는 늙으려고 이 세상 끝까지 왔나보다
북두칠성이 물가에 내려와 발을 적시는
호수, 적막하고 고즈넉한 물에 비친 달은
붉게 늙었다 저 괴물 같은 아름다운 달
뒤로 부옇게 흐린 빛은 오로라인가
이 궁벽한 모텔에서 아직 다하지 않은 참회의
말 생각하며 한밤을 깨어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어디론가 사라질
삶, 징그러운 얼굴들 뿌리치려 밤 새
몸 흔드는 나뭇잎들, 아주 흐리게 보이는
소리 사이로 눈발 같은 미련 섞여 있어
눈물겹다 세상의 길이란 길
끝에서는, 삭은 두엄 냄새 같은, 편안한
잠 만날 줄 알았건만 아직 얼마나 더
기다려야 저 기막힌 그리움
벗어 놓는단 말인가 부끄러운 나이 잊고
한밤을 여기서 늙어 머리 하얗게 세도록
바라본다 허망한 이승의 목숨 하나가
몸 반쯤 가린 바람 사이로 흔들리는 것을 *
* 마네킹
마드모아젤 양장점 앞을 십 년 넘게 지나다녔어도
쇼 윈도우 안의 마네킹 셋이 흘끗거리는 건
오늘 아침 출근길에 처음 보았다
톨로즈 로트렉의 '물랭루즈'에 나오는
빨간 스타킹의 비뚤어진 무희 같은
키 큰 마네킹이 돌아 서 있고
'7년만의 외출'의 마릴린 먼로 같은
젖가슴 늘어지고, 음탕하고
맨 종아리 허벅지까지 드러낸, 백치 같은
거품 많은 마네킹이 마주 서 있다
은사시나무, 여름 달빛에 흔들리는
잎맥 가늘고 여린
바비 인형 같은 마네킹은 고개를 숙이고
안 보는 척 하면서 눈길을 주고 있다
입술 삐쭉 내밀며 아랫도리 오므리는
저것들이 구미호 다 된 줄을
오늘 처음 알았다
퇴근길엔
학교 운동장에 세워둔 내 늙은 자동차도
너무 오래 쓸쓸한 어둠 속에 떨었노라고
암내 맡은 나귀처럼 툴툴거렸다
* 조창환시집[마네킹과 천사]-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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