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 곽재구
눈 오시네
와온 달천 우명 거차 쇠리 상봉 노월 궁항 봉전 율리
파람바구 선학 창산 장척 가정 반월 쟁동 계당 당두
착한 바닷가 마을들
등불 켜고 고요히 기다리네
청국장에 밥 한술 들고
눈 펄펄 오시네
서로 뒤엉킨 두 마리 용이 빚은
순금빛 따스한 알 하나가
툭
얼어붙은 반도의 남녘 개펄 위로 떨어지네 *
* 와온臥溫 가는 길
보라색 눈물을 뒤집어쓴 한그루 꽃나무*가 햇살에 드러난 투명한 몸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궁항이라는 이름을 지닌 바닷가 마을의 언덕에는 한 뙈기 홍화꽃밭**이 있다
눈 먼 늙은 쪽물쟁이가 우두커니 서 있던 갯길을 따라 걸어가면 비단으로 가리워진 호수가 나온다 *
* 멀구슬나무라고 불리며 초여름에 보라색 꽃이 온 나무에 핀다.
꽃이 진 뒤 작은 도토리 같은 열매가 앵두 열듯 열리는데 맛은 없다.
겨울이 되면 잎 진 가지에 황갈색 열매가 남는다. 눈이 온 산야를 덮으면 먹을 것이 없어진 산새들이
비로소 이 나무를 찾아와 열매를 먹는다. 남녘 산새들의 마지막 비상식량이 바로 멀구슬나무 열매다.
깊은 겨울 누군가를 끝내 기다려 식량이 되는 이 나무의 이미지는 사랑할 만한 것이다.
**삼베나 비단에 분홍빛 염색을 할 때 쓰인다. 연분홍 치마가 봄 바람에 휘날리더라, 할 때 연분홍의 근원이 바로 이 꽃이다.
김지하 시인은 천연 염색으로 빚어진 한국의 빛들을 꿈결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홍화로 염색한 이 분홍빛이야말로
꿈결 중의 꿈결이라 할 것이다.
* 나한전 풍경
고물 선풍기가
밤새 돌고 있는 그 나한전에는
부처님이 좌정할 연꽃방석 같은 것은 없어서
할 일 많으신 부처님 모실 생각은 애시당초 없고
간혹 시궁쥐나 도둑고양이의 울음소리만
텅텅 목어를 두드리다 가는데
낮 동안
살과 뼈를 다 벗긴 이 집의 나한들이
밤이 되면 천도복숭아 하나씩 들고 돌아와
월세 십오만원 선풍기 바람 아래 눕지요
이때만은 고물 선풍기도
아주 선선한 별빛을 바람 속에 섞어 날리기도 하는데
세평 반지하 나한전 앞에는
그 흔한 목백일홍 꽃나무 하나 서 있지 않고
돌구시 위 쪼르르 떨어지는 대나무통 물길 하나 흐르지 않고
피곤에 전 나한들의 꿈만 번져가는데
그때 손톱에 봉숭아물 보기 좋게 들인
나한의 손 하나가 바로 곁에 누운
기름때 밴 보살의 손을 슬며시 잡는 모습이 보이는데요
아마도 흰 소를 타고
이승의 제일 맑고 시원한 호수로 소풍 가는
꿈을 꾸는 것은 아니겠는지요
그때 그 꿈 언저리에
목백일홍꽃들 수북수북 피어나고
월출산 도갑사 대웅전 앞마당에 놓인
아주 씩씩하고 잘 생긴 돌구시 위로
쪼르륵 쪼르륵 산물은 극락처럼 또 흘러내리는 것은 아니겠는지요 *
* 붉은 시전지
부용리 마을회관
시멘트 벤치 앞에 차 세우고
가스불 피워 라면을 끓입니다
이따금 방목하는 염소도 지나가고
동천다려 민박집 진돗개 봉순이도 지나가고
멀구슬나무 열매 쪼던 콩새들 까르르 웃으며 지나가고
부산이나 광주 번호판 단 승용차들 때 없이 지나가는
길가에 쭈그려앉아 라면 가닥 익기를 멀거니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마을회관 앞 늙은 동백나무 한그루가
툭 꽃망울 하나를 길 위에 떨굽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용리 동백나무 숲길에는
떨어진 동백꽃들 지천이어서
떨어진 동백꽃 하나 보고
라면 한 가닥 입에 넣고
동백꽃 하나 눈 맞추는 동안
청별항 뱃고동 소리 길게 들어오고
여기저기 떨어진 동백꽃
세월은 절로 가고
떨어진 동백꽃 눈 맞추는 동안
나 역시 저 늙은 동백나무처럼
붉디붉은 사랑의 시 한편
이 지상에 툭 떨굴 날 부끄러이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
* 선암사 은목서 향기를 노래함
내 마음이 가는 그곳은
당신에게도 절대 비밀이에요
아름다움을 찾아 먼 여행 떠나겠다는
첫 고백만을 생각하고
당신이 고개를 끄덕인다면
그때 나는 조용히 웃을 거예요
알지 못해요 당신은 아직
내가 첫여름의 개울에 발을 담그고
첨벙첨벙 물방울과 함께 웃고 있을 때에도
감물 먹인 가을옷 한벌뿐으로
눈 쌓인 산언덕 넘어갈 때도
당신은 내 마음의 갈 곳을 알지 못해요
그래요 당신에게
내 마음은 끝내 비밀이에요
흘러가버린 물살만큼이나
금세 눈 속에 묻힌
발자국만큼이나
흔적 없이 지나가는 내 마음은
그냥 당신은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 *
* 곽재구시집[와온 바다]-창비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련(睡蓮) - 심창만 (0) | 2012.06.12 |
---|---|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 마디 말 - 정희성 (0) | 2012.06.12 |
안개속에 숨다 - 류시화 (0) | 2012.05.18 |
떨어진 꽃 하나를 줍다 - 조창환 (0) | 2012.05.18 |
그리운 이 그리워 - 오세영 (0) | 2012.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