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오래된 여행가방 - 김수영(金秀映)

효림♡ 2014. 8. 2. 18:06

* 오래된 여행가방 - 김수영(金秀映)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 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

 

* 봄밤 - 김수영

 

고향 오라버니 같은 남자와 마주앉아 술을 마신다
뚝배기 속에서 끓는 번데기
다섯 잠을 자던 누에는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일까
다섯 겹 혹은 일곱 겹 주름을 뒤적이며
무심하게 안부를 묻는다


이십대와 삼십대를 건너뛰는 동안
그리워할 일도 미워할 일도 없었던 것일까
사각사각 푸른 뽕잎 위에 누워 낮잠을 잔 것처럼
눈이 부셔 흐린 안경을 잠깐 닦았던 것뿐인데...
우리는 그림자끼리 마주앉아 있다

 

그는 취하지도 않고 비틀거리지도 않고,
나는 젖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돌아서 가는 등 뒤로 마른 산처럼 어깨가 솟아 있다
나보다 10년을 또 먼저 가는 사람

하염없이 흔들흔들 산길을 걷고 싶은 밤,
살찐 봄바람만 낯익은 골목으로 불어온다
날개는 다들 어디다 벗어두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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