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당신의 날씨 - 김근

효림♡ 2015. 1. 20. 19:35

* 당신의 날씨 - 김근

돌아누운 뒤통수 점점 커다래지는 그늘 그 그늘 안으로

손을 뻗다 뻗다 닿을 수는 전혀 없어 나 또한 돌아누운 적 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출 수 없어 나 또한 그만 눈 감은 적 있다

멀리 세월을 에돌아 어디서 차고 매운 바람 냄새 훅 끼쳐올 때

낡은 거울의 먼지 얼룩쯤에서 울고 있다고 당신의 기별은 오고

갑작스러운 추위의 무늬를 헤아려 되비추는 일마저 흐려진 아침

하얗게 서리 앉은 풀들의 피부에 대해서 안부를 묻는 일도

간밤 산을 내려와 닭 한 마리 못 물고 간 족제비의 허리

그 쓸쓸히 휘었다 펴지는 시간의 굴곡에 대해서 그리워하는 일도

한 가지로, 선득한 빈방의 윗목 같을 때, 매양 그러기만 할 때,

눈은 내려 푹푹 쌓이고 쌓이다 쌓이다 나도 당신의 기별도 마침내

하얘지고 그만 지치고 지치다 지치다 봄은 또 어질어질 어질머리로

들판의 주름으로 와서 그 주름들 사이로 꽃은 또 가뭇없이 져 내리고 꽃처럼도

나비처럼도 아니게 아니게만 기어이 살아서 나 또한 뒤통수 그늘 키우며

눈도 못 뜰 세월 당신은 또 무슨 탁한 거울 속에서나 바람 부는가 늙고 늙는가

문득 그렇게 문득문득만 묻고 물은 적 있다 있고 있고 있고만 있다

 

*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이제 우리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구름떼처럼은 아니지만 제 얼굴을 지우고 싶은 사람들 하나둘 숨어드는 곳 햇빛 따위는 잊어버려도 좋아요 날카롭게 돋아나서 눈을 찔러버리는 것들은 잊고 구름으로 된 의자에 앉아 남모르게 우리는 제 몫의 구름을 조금씩 교환하기만 하면 되지요 [구름목장의 결투]나 [황야의 구름] 같은 오래된 영화의 총소리를 굳이 들을 필요는 없어요 구름극장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네모난 영사막은 뭉게뭉게 피어올라 금세 다른 모양으로 몸을 바꾸지요 그럴 때 사람들이 조금씩 흘려놓은 구름 냄새에 취해 잠시 생각에 잠겨보는 건 어때요 오직 이곳에서만 그대와 나인 우리 아직 어둠속으로 흩어져버리기 전인 우리 서로 나눠가진 구름의 입자들만 땀구멍이나 주름 사이에 스멀거리기만 할 우리 아무것도 아닐 그대 혹은 나 지금은 너무 많은 우리 사람들이 쏟아놓은 구름 위를 통통통 튀어다녀보아요 가볍게 천사는 되지 못해도 얼굴이 뭉개진 천사처럼 하얗고 가볍게 이따금 의자를 딸깍거리며 구름처럼 증발해버리는 사람이 있어도 그런 건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지요 구름극장이 아니어도 우리도 모두 그처럼 가볍게 증발해버릴 운명들이니까요 햇빛 따위는 잊어버려도 좋아요 구름에 관한 동시상영 영화들은 그리 길지 않아요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저녁이면 둥실 떠올라 세상에는 아주 없는 것 같은 구름극장 말이에요 *

* 김근시집[구름극장에서 만나요]-창비, 2008

 

* 분서(焚書) 3

선왕께서 한날은, 이제 봄!이라 하시매, 이제 봄!이라 적었나니,

어디서 불려왔는지 모를 사내아이들과 계집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궐 안에 시끌시끌 넘쳐났더이다 하나, 꽃처럼은 아니고 나비처럼만

궁의 뜰을 날아서 연회에까지 불려나와 시끌시끌 신하들의 귀에

달라붙어 앉았는데 신하들 죄다 귀에서 피를 쏟고 쓰러졌더이다

선왕께서 한날은, 비로소 봄!이라 하시매, 비로소 봄!이라 적었나니,

궁궐의 나무란 나무는 모도 꽃 필 자리에 종기를 매달고 곪고 곪다가

끝내는 툭, 툭, 터져 피고름 온통 질질질 낭자하고 궐 안이 썩은 내로

진동하였으니 어린 내시들의 성기 모조리 잘리고 어린 무수리들

모조리 처녀를 잃고 꼬부랑꼬부랑 하루아침에 늙은 뒤였더이다

선왕께서 한날은, 시름에 겨워 짐이 봄! 하면 거짓으로라도 봄일진대

야속고 야속다, 하시며 다시 꽃! 하시매, 다시 꽃!이라 적었나니,

헤아릴 수도 없는 뱀들만 타래타래로 뻣센 비늘마다 꽃을 피워 궐 안에 창궐했더이다

선왕께서는, 그예 광분하시었나니, 그러기가 삼동 휘몰아치는 눈보라 같았더이다

구중의 담장과 벽 들 꽝꽝 얼어붙어 고드름조차 달리잖고 불기운도 없는 냉골의 침소에서

온몸에 동상을 입어 쩍쩍 갈라져 터지는 얼굴로 선왕께서 친히 불러 이르시되,

실록에는 가까스로 봄!이라고만 라고만 기록하라, 가까스로 하시매,

소신 망극에 망극을 무릅쓰고 그길로 퇴궐하여 이날 입때껏 필경사로나 떠돌았사온데,

한 이른 봄 들리는 풍문에 실록이야 씌어지기가 부지하세월인데 선왕께서는, 시푸르뎅뎅

산송장으로다만 가까스로 봄! 이라고만 라고만, 얼음 게워내며 지껄이고 지껄이신다 하였더이다

 

* 길을길을 갔다 
여자가 살을 파내고 나를 심는다
나는 아무 저항 없이 여자의 살에 뿌리를 내린다
내 실뿌리들이 혈관을 타고 여자의 온몸으로 뻗어 나간다
여자를 빨아먹고 나는 살찐다
언젠가 여자는 마른 생선처럼 앙상해질 것이다

옛날에도 그랬다

나는 커다란 종기처럼 여자에게서 자랐다
나라는 고름 주머니를 달고 여자가 길을길을 갔다
* 김근시집[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문학과지성사, 2014

 

* 김근 시인

-1973년 전북 고창 출생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뱀소년의 외출][구름극장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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