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만 쓰네 - 이기철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山房에 벗어놓은 흰 고무신 안에 혼자 놀다 간 낮달을
내게로 날아오다 제 앉을 자리가 아닌 줄 미리 알고 되돌아간 노랑나비를
단풍잎 다 진 뒤에 혼자 남아 글썽이는 가을 하늘을
한 해 여름을 제 앞치마에 싸서 일찌감치 풀숲 속으로 이사를 간 엉겅퀴 꽃씨를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사월 달래순이 묵은 돌덩이를 들어 올리는 힘을 본 것도 같은데
저를 좀 옮겨달라고 내 바지 자락에 매달리는, 어언 한 해를 다 살아버린 풀씨의 말을 알아들은 것도 같은데
아직도 흙 이불로 돌아가지 못한 고욤 열매의 추위를 느낀 것도 같은데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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