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꽃잠 - 김용택

효림♡ 2015. 5. 18. 09:00

* 꽃잠 - 김용택 

저기 저 남산 꽃산에

꽃 되어 가는 길

그대 만나 우리 함께

봄잠 들었네

잠자는 동안 꽃들은 피어나

우리를 덮고

새들은 날아

푸른 하늘 열었네

 

우리 둘이 꽃산 되어

깊은 잠 잘 때

어린 산 하나

꽃 속을 걸어나와

돌아다니며 놀다가

작은 꽃산 되어

우리 사이에 꽃잠 자네

 

우리 오늘 난생 처음

꽃 속에 꽃산 되어

식구끼리 행복한 꽃잠 잘 때

집집이 꽃 피어 울 넘고

마을에서 마을로

꽃길이 열리었네.

 

* 꽃잠 - 이재무  

꽃 피운 목련나무 그늘에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 펼쳐놓는다

아니, 시는 건성으로 읽고

행간과 행간 사이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햇살은 낱알로 내려 뜰 가득 고봉으로

소복 쌓이고 시집 속 봄볕에

나른해진 글자들

겯고 튼 몸 뒤틀다가 하나, 둘, 셋

느슨하게 깍지를 풀고

꼬물꼬물, 자음과 모음 벌레 되어 기어나온다

줄기와 가지 따라 오르고

꽃 치마 속 파고들기도 한다

간지러운 듯 나무가 웃고

꽃은 벙글벙글

이마에 책 쓰고 누워

배 맛처럼 달고 옅은 꽃잠을 잔다

 

* 꽃잠 - 김종제

우주 밖의
내 머나먼 고향까지
대궁을 밀어올려
꽃처럼 깨어 있다가
꽃처럼 잠들었으면 좋겠다
화들짝 개벽같이 놀라며
꽃 피어서
눈 동그랗게 뜨고 있는 찰라에
무리지은 별 같은 세월이
손 흔들며 지나가겠다
햇볕도 달빛도
낯선 시간처럼 옷깃을 스쳐가겠다
그 중에 사랑하는 날도 있어서
따스한 눈빛 마주치겠지
목숨 일찍 지기도 해서
내 옆에는 항상
가엾은 나를 닮은
무덤의 관이 놓여 있겠다
내가 활짝 피었던 곳이
잠시 꽃 내밀었던 이승 아닐까
잠든 얼굴이 외려 꽃 핀 모습이겠다
그러니 꽃 며칠 피어 있겠다고
깨어 있는 순간을 견디느라
그 얼마나 힘들었을까 
꽃처럼 피어 있겠다고
아니 꽃처럼 잠들어 버리겠다고
한동안 세상을 잊어버렸다

 

* 꽃잠 - 김규성  

꽃잠이라고 했다 꽃들의 잠? 아니면 꽃처럼 고운 잠? 그러나 꽃은 온몸을 활

짝 뜨고 눈부시게 살 떨려 깨어 있음 아닌가 아마도 신혼의 꿀잠만한 열흘 꽃

의 설렘이 맞을, 국어사전에도 잘 눈에 띄지 않는 순우리말이 혀끝에서 감칠수

록 달다 요새 그 꽃잠을 자주 들킨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막幕 중의 아주 짧은

막간幕間, 섬광 같은 이승을 순간 포착하려는 어여쁜 수작 같은, 그리하여 아주

죽음에 이르러서야 야, 꽃잠 한 숨 잘 잤다고 잘 익은 꽃향기처럼 화들짝 깨어

날 것만 같은, 그래! 누군가 너무 쉽사리 못박아놓은 고해苦海가 꽃잠이라면 이

왕 꽃 중의 꽃으로 아름답고 알큰한 꿈이나 꾸자꾸나 사랑이여, 그 잠꼬대를

꽃말처럼 바지런히 받아 적는가

 

* 꽃잠 - 양숙

그저 그냥
화끈화끈 콩닥콩닥
어찌할까 어찌하나


달아오르는 얼굴 감추려
후후 날숨 얼굴 식혀보지만
귓불 붉어짐 숨길 수 없고


뛰는 가슴 진정시키려
양손 가슴 꾹 눌러보지만
손등까지 덩달아 뛰어오르네
* 양숙시집[하늘에 썼어요]-우리글시선

 

* 꽃잠 - 이병일

  봄 산에 꽃보러 간다 연초록이 눈을 콕콕 찌른다 내 몸의 힘줄이 팔짝 솟구치고,

진달래꽃 정령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꽃잎 속에 나보다 먼저 꽃구경 나온 벌

나비가 한가로이 가부좌 틀고 있다 오늘도 나는 하루를 공친다. 공산(空山)에

들어설 때까지 저렇게 꽃잠에 취해 혼(魂)을 도둑맞은 사람도 있겠다 천지간에 온갖

화관(花冠)들이 현현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정상에 오른 나는 절로 무릎을 친다.

꽃구경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금방 마신 꽃빛 때문에 마냥 기분이 좋다, 그때

나는 화음(花陰)에 취한 검은 눈의 짐승이 되었다 그저 맑고 가난한 꽃잎이 화냥의

그것처럼 보인다.

* 이병일시집[옆구리의 발견]-창비,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