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流謫 (유적) - 조용미

효림♡ 2008. 11. 18. 08:55

                            

 

* 유적(流謫) - 조용미 

오늘밤은 그믐달이 나무 아래

귀고리처럼 낮게 걸렸습니다

은사시나무 껍질을 만지며 당신을 생각했죠

아그배나무 껍질을 쓰다듬으면서도

당신을 그렸죠 기다림도 지치면 노여움이 될까요

저물녘, 지친 마음에 꽃 다 떨구어버린 저 나무는

제 마음 다스리지 못한 벌로

껍질 더 파래집니다

멍든 푸른 수피를 두르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벽오동은 당신이 그 아래 지날 때

꽃 떨군 자리에 다시 제 넓은 잎사귀를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당신의 어깨를 만지며 떨어져내린 잎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

당신이 지금 와서 안다고 한들

그리움도 지치면 서러움이 될까요

하늘이 우물 속 같이 어둡습니다  *

 

* 무진등

별은 무진등이다
다함이 없는 등불
꺼지지 않는 무진등

내 안에 다함이 없는 등불
꺼지지 않는 무진등이 하나 있다

숨겨놓은 말들에
하나씩 불을 켠다

내 몸은
그 등불의 심지다 *

 

* 밤의 정수사

개심사 입구 세심동에
끓는 물속에 담가진 얼음처럼
몸이 녹아내렸다

뜨거운 찻잔 속에서도 나는
아주 녹지 않는 얼음이었다

아기부처가 그려진 현등이 꿈결인 듯
먼 행성처럼 빛을 내뿜고 있는
밤의 정수사

내가 얼음의 몸을 가졌음을
뜨거운 물속에서야 알 수 있게 되었다

꽃잎들이 나비무 바라무를 추며
허공을 내려오는 봄밤,

뜨거운 찻잔 속에서도 나는
아주 녹지 않는 얼음이었다라는가 *

 

* 가을밤 
마늘과 꿀을 유리병 속에 넣어 가두어두었다 두 해가 지나도록 깜박 잊었다 한 숟가락 뜨니 마늘도 꿀도 아니다 마늘이고 꿀이다//

당신도 저렇게 오래 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형과 질이 변했겠다//
마늘에 緣하고 꿀에 연하고 시간에 연하고 동그란 유리병에 둘러싸여 마늘 꿀절임이 된 것처럼//
내 속의 당신은 참 당신이 아닐 것이다 변해버린 맛이 묘하다//
또 한 숟가락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을,//
가을밤은 맑고 깊어서 방 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어앉는다 * 

* 조용미시집[기억의 행성]-문학과지성사


* 적막이라는 이름의 절

  적막이라는 이름의 절에 닿으려면 간조의 뻘에 폐선처럼 얹혀 있는 목선들과 살 속까지 내려꽂히며 몸을 쿡쿡 찌르는 법성포의

햇살을 뚫고 봄눈이 눈앞을 가로막으며 휘몰아치는 저수지 근처를 돌아야 한다 무엇보다 오랜 기다림과 설렘이 필요하다

  적막이라는 이름의 나무도 있다 시월 지나 꽃이 피고 이듬해 시월에야 붉은 열매가 익는 참식나무의 북방 한계선, 내게 한 번도

꽃을 보여준 적 없는 잎이 뾰족한 이 나무는 적막의 힘으로 한 해 동안 열매를 만들어낸다

  적막은 단청을 먹고 자랐다 뼈만 남은 대웅전 어칸의 꽃문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이내 적막이 몸 뚫고 숨 막으며 들어서는 것을 알 수 있다 적막은 참식나무보다 저수지보다 더 오래된 이곳의 주인이다

  햇살은 적막에 불타오르며 소슬금강저만 화인처럼 까맣게 드러나는 꽃살문 안쪽으로 나를 떠민다 이 적막을 통과하고 나면

꽃과 열매를 함께 볼 수 있으리라 *

 

* 청동거울의 뒷면  

내가 보는 것은 늘 청동거울의 뒷면이다

청동거울을 들여다보기까지

짧은 순간의 그 두려움을 견뎌야만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볼 수 있다

구름문, 당초문, 연화문...

시간의 두께에 덮인 녹, 그 뒷면에

정말 무엇을 비추어볼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청동거울 안의 나를 보고 싶다

업경대를 들여다보듯 천천히 동경(銅鏡)을 들어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 보고 있는

쌍어문경(雙魚紋鏡)을 얼굴 앞으로 끌어당겨야 하리

남녀와 시종들과 명기(冥器)들 속에서

푸른 옷을 껴입으며

오랜 어둠 속에서 새겨놓았던 또렸한 얼굴 하나를  

쓰윽 손으로 한 번 문지르기만 하면

몇백 년의 시간이 다 지워지고

거기 푸른 녹이 가득 덮인 거울 위에

거울을 들여다보던 오래전 사람의 얼굴이 나타날 것이다

두근거리며 나는 거울의 뒷면에 새겨진

쌍어문을 천천히 어루만진다 *

 

*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꽃 피운 앵두나무 앞에 나는 오래도록 서 있다

내가 지금 꽃나무 앞에 이토록 오래 서 있는 까닭을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할까

부암동 白沙室은 숲 그늘 깊어

물 없고 풀만 파릇한 연못과 돌계단과 주춧돌 몇 남아 있는 곳 

 

한 나무는 꽃을 가득 피우고 섰고

꽃이 듬성한 한 나무는 나를 붙잡고 서 있다

 

이쪽 한끝과 저쪽 한켠의 아래 서 있는

두 그루 꽃 피운 앵두나무는

나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아주 가깝지 않게 떨어져 있는데

바람 불면 다 떨구어버릴 꽃잎을 위태로이 달고 섰는

듬성듬성한 앵두나무 앞에서 나는

멀거니 저쪽 앵두나무를 바라보네

숨은 듯 있는 별서의 앵두나무 두 그루는

무슨 일도 없이 꽃을 피우고 있네

한 나무는 가득, 한 나무는 듬성듬성 

 

나는 두 나무 사이의 한 지점으로 가서 가까운 꽃나무와

먼 꽃나무를 천천히 번갈아 바라보네

앵두가 열리려면 저 꽃이 다 떨어져야 할 텐데

두 그루 앵두나무 사이에 오래 서 있고 싶은 까닭을

나는 어디에 물어야 할지

무슨 부끄러움 같은 것이 내게 있는지 자꾸 물어본다 * 

* 조용미시집[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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